차차의 Re:view #8: 우생학기록보관소로 보는 아카이브, 그 양날의 검

요즘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서 영감을 얻어 사랑과 혼돈, 과학적 집착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저자는 새로운 물고기 종을 발견하고 명명하는 연구를 해오다가 어느 날 지진으로 물고기 표본과 이름표가 모두 흩어져 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묵묵히 연구를 지속해나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그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저자는 데이비드에 관한 기록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찾아가 혼돈 속에서도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을 찾다가 그의 어두운 과거를 발견합니다. 바로 데이비드가 인종 간 위계질서가 있다는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이를 미국에서 법제화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데이비드는 우생학을 반대하는 세력이 거세지자 우생학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욱 강력히 밀어붙입니다. 이때 데이비드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변인들의 기부를 독촉하여 세운 기관이 바로 우생학기록보관소(Eugenics Record Office, ERO)입니다.

<1920년대 우생학기록보관소>

당시 뉴욕주 콜드스프링하버에 세운 이 기록보관소는 미국인 수십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이 정보를 활용해 가난, 범죄성, 방탕함, 부정직, 심지어는 바다를 좋아하는 취향까지 복잡한 현상들이 핏속에 미리 정해져 흐르고 있다는 가계도를 만들었습니다. 카네기 재단과 록펠러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지원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기록의 행방은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Cold Spring Harbor Laboratory)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890년에 설립된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는 암, 신경과학, 식물생물학, 정량생물학 등의 프로그램으로 현대 생물 의학 연구와 교육을 이끌고 있는 명망있는 기관입니다. 홈페이지에서는 연구 분야와 관련된 다양한 아카이브와 컬렉션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 ERO와 ERO가 수집한 기록물 컬렉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의 ERO 컬렉션 소개 화면>

1910년에 설립된 ERO는 미국의 가족 유전과 형질 이력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의 타고난 신체적, 정신적, 기질적 특성과 같은 정보를 수집하여 선천적이거나 상속 가능한 성질이 있는지 연구하는 목적입니다. 패밀리 스터디 파일이라고 불리는 기록물철에는 개개인의 분석 카드, 현장 작업자의 보고서, 혈통 차트, 사진, 우생학에 관한 해외 연구자료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ERO는 설문지를 개발해 집집마다 뿌리고 거두는 방식으로 개인의 특성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24년까지 750,000개에 달하는 색인 카드를 모았습니다. 연구소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에 대한 우려가 증가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우생학적 사상이 전파되기 쉬웠을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부적합자(Defectives)에 대한 불임을 주장하고 우생법을 위한 로비를 벌이는 등 우생학적 사상을 전파했던 이 ERO는 1939년 결국 문을 닫게 됩니다. ERO의 기록물은 미네소타 대학교에 기증되어 다이트인간유전학 연구소에서 사용되다가 후에는 미국철학회, 잭슨 연구소, 유타 족보학회 등 세 기관으로 분산됩니다.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가 ERO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연구소의 ERO 컬렉션 소개글에는 ERO 관련 기록이 인종차별적이거나 구시대적인 용어, 표현 등 유해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생학자들의 연구가 미국 내에서 이민법을 제한하고 부적합자로 낙인 찍힌 자들에게 불임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유대인 등 인종을 살균해야 한다는 논리의 기초가 되는 등 광범위한 부작용을 일으켰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 1851년 1월 19일 ~ 1931년 9월 19일)>

미국이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우생학을 법제화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꺼려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연구소가 ERO 컬렉션을 공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20세기 우생학의 역사를 배우는 목적을 넘어 유전 기술을 윤리적으로, 또 책임 있게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기록의 생산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구시대적인 용어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며, 연구소에서 통제 가능한 부분이라면 적극적으로 수정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ERO를 조사하면서 기록과 정보를 수집하는 아카이브는 과연 편파적이거나 권력을 대변하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특정한 목적을 갖고 기록을 생산하거나 수집하는 아카이브의 본질적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또 방대한 기록을 모으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수적인데 이러한 행정력은 소수의견을 반영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가 ERO 컬렉션을 서비스하는 것처럼)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도달한 윤리적 지점에서 아카이브를 성찰한다면 기록은 사실과 맥락 그 이상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스스로 구기고 왜곡한 과거를 다시 평평하게 되돌리는 것도 아카이브의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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