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비스트가 말하는 아키비스트 인터뷰시리즈-15
일이나 공부를 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지면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점검을 해볼 수도, 새로운 일을 해볼 수도, 아니면 가능한 선에서 좀 쉬면서 쉼표를 찍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 달에는 그런 국면에 접어 들면 새로운 환경을 선택하는 분을 만나보았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총무팀 이승용 과장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그것을 지켜가며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인용: 각주 1)’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번 달의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 일시 : 2019. 8. 3. (토) 13:00-14:30
- 장소 : 옥수역 빈플래토
- 인터뷰 : 류신애
- 정리 : 류신애, 황진현
본인과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소개 해달라.
이승용. 현재는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이하 제주개발공사)에서 기록물관리 업무를 하고 있다. 문서배부와 직인관리 등도 하지만 주로 기록관리 업무 중심이다. 내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나올 질문들에 대한 답을 통해 차근차근 말할 수 있겠다.
지금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꼽는다면?
아내, 생각하는 나, 행동하는 나이다.
우리 가족은 나와 아내 둘 뿐이기 때문에 아내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다. 아내의 존재가 내 의식의 상당부분을 규정하기도 한다.
생각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다.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좀 살자. 기록관리는 이렇게 좀 해보자.’라고 지시하는 이상적인 쪽이라면, 행동하는 나는 생각하는 나를 따라가지 못한 채 현실에 서있는 나이다. 간혹 생각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가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예전 동료들을 만날 때인데, 얼마 전 연구원(RIKAR)에서 함께 일했던(2010~12년경) 동료들을 만날 때 밤새워 토론하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땐 서로가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말하고 표현하며 고민할 수 있어서 어느 순간 정화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 쉽지는 않지만 두 내가 사이좋게 잘 지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웃음)
사람들은 ‘제주도’를 보통 휴양의 장소로 생각한다. 제주도에서 일하는 삶은 실제로 어떤가?
‘삶’을 물어보았는데 삶이란 ‘관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삶’을 산다는 건 ‘그 사람이 어떤 관계 속에 있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제주도에 휴양하러 오는 사람에게 있어서 ‘관계’라는 게 존재할 리 없다. 휴양이라는 게 일상의 ‘삶’으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행동이 아닐까. 잠시만이라도 자신이 얽힌 ‘관계’로부터 벗어나고자 떠나는 것이 휴양인 것이다. 휴가 온 직장인에게는 직장으로부터, 며느리에게는 시집으로부터 연락이 오는 것만큼 휴가 분위기를 망치게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닐까. (웃음)
나는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이다. 이 말 자체로 대답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구분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효리도 제주도에 살고 나도 제주도에 살지만 이효리와 나의 삶은 이효리와 이승용의 차이만큼 크다는 점이다. 이효리는 경제적 자유인이기때문에 ‘관계’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경제적 예속인이기 때문에 ‘관계’를 선택할 수 없다. 모든 희비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한 때 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웃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기록학대학원의 첫 입학생이다. 대학원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입학을 결정했는지 궁금하다.
1999년도 가을로 기억한다. 나는 학부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할 때였다. 명지대학교에 있는 김익한 박사라는 젊은 사람이 기록학이라는 새로운 공부를 준비 중인데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친한 선배가 권유했다. 명지대학교 별관 2층에 있는 연구실에서 처음 만났고, 기록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보다는 설교라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당시에는 기록학이 학문이라기보다는 운동으로 느껴지고 다가왔다. 민주화, 사회 투명성 확보 등 사회 과제를 해결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학문적 수단이나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사학 전공자로서 하고 싶은 공부라기보다는 해야만 하는 공부라 여기고 마음을 결정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기록학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기록관리라는 말을 만들어(造語)가는 시절이기도 하였다. 공부를 하고 학위를 취득해도 무엇이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때였다. 동기는 10명 정도 되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그렸던 ’10년 후 이승용’의 모습은?
전혀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공부를 미리 하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일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기간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시위에 참여 했던 기억이다.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기록물 관리를 똑바로 해야 한다는 운동을 펼쳤다. 당시 정보공개법이 막 운영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정부기관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정보공개를 요구하면 정부에서는 늘 ‘기록이 없다’고 대응했다. 그때마다 기록관리를 똑바로 해야 한다며 광화문(이나 세종문화회관) 앞에 조선시대 사관복을 입고 나가서 퍼포먼스를 했다.
하나는 외국 학술지와 관련된 에피소드이다. Archivaria와 American Archivist를 구입하고 싶어서 이메일을 보냈었는데, 그 쪽에서 ‘너네도 그런 공부를 할 생각을 하다니 참 기특하구나! 우리가 어려운 나라는 도와준단다.’하는 뉘앙스의 답변과 함께 시리즈 한 질을 무상으로 보내주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묘한 경험이었다. 그걸 보면서 공부를 했다.(웃음)
석사논문을 2010년에 썼다. 공백이 좀 있는데 석사과정 수료 후 논문을 쓸 때까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치료를 하고 휴식을 취하느라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아마 겪어본 사람은 이해할 텐데, 사람이 건강에 이상에 생기면 생각지도 않았던 본질적 고민을 하게 된다. 평범한 생활인들에게는 중요할 수 있는 학업, 진로, 연애 같은 것들이 일순간에 하찮은 문제가 된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 등을 들여다보게 된다. 기록학이나 기록관리 운동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동기와 후배들이 중앙부처에 배치되고 활동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부기록보존소가 국가기록원으로 개편되고 하루아침에 대통령기록관이 설치되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하고 싶은 공부라기보다는 해야만 하는 공부라고 생각했던 내 입장에서는 일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때는 몸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나에게는 몸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대통령기록관에서 대통령기록물 공개재분류 사업을 수행하던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에도 내 안부를 염려하던 친구 같은 후배였는데, 사업 수행 중 결원이 생겨 급하게 도움을 청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당시 기록학을 다시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몸을 좀 움직여야 하겠다는 생각에 그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 가운데 뜻하지 않게 맞은 편 자리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됐다. 아내의 유일한 요구 사항이 내가 논문을 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되었고, 그렇게 오로지 통과를 목적으로 논문을 썼다. 세상에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커리어는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첫 직장은 2010년에 들어간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이다.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 날짜를 잡았었는데, 연구원에 취직하면서 주례 선생님이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의 연구원이라고 신랑 소개를 하실 수 있었다. 고마웠다.(웃음)
워낙 공부를 오래 쉰 상태로 연구원에 들어가서 모르는 것도 많았고, 그래서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시에 진행되는 다양한 일에 조금씩 지쳐갔고, 어느 순간 자기 복제를 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년 조금 넘게 일했다.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도 약속받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너리즘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재미만을 좇아서 일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점점 일하는 재미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사실 그동안 미뤄둔 숙제도 있었고 다른 꿈도 꾸고 싶었다.
두 번째 직장인 한국국제협력단(이하 KOICA)에 입사했다.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의 경험은 어땠는지 듣고 싶다.
당시에 여러 곳에 원서를 냈고, 최종까지 올라갔다가 잘 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KOICA 공고가 났을 때에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집착하는 마음 없이 편하게 임했는데 운명처럼 합격했다.
KOICA는 기관 특성상 보건전문가, 교육전문가, 건축전문가 등을 채용하는데 그들에게는 ‘전문관’이라는 호칭을 주고 비교적 대우를 깍듯이 해주는 편이었다. 기록물관리전문요원도 ‘기록 전문관’으로 채용하였다. 업무도 기록관리 업무만 전담하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일을 열심히, 잘 할 수밖에 없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지원도 잘 해주고 대우도 괜찮았기 때문에 그에 부응해 정말 열심히 일했고, 기관에서도 그런 나에게 고마워했던 것 같다.
KOICA에 재직하고 있을 때 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 유공 포상 장관상을 받았다.
그보다는 나에게 더 의미가 있었던, 퇴직 이후에 받은 이사장 표창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2015년에 KOICA에서 퇴직을 했다. 당시 KOICA는 연말에 전 직원 중 한두 명 정도에게 표창을 주었는데, 이사장의 결정으로 이미 퇴직한 직원인 내가 표창을 받게 되었다. 인사 부서의 담당자는 처음에 ‘근무경력도 길지 않고 이미 퇴직한 직원에게 표창을 한 사례는 없다’며 난감해 했다고 한다.
감사패로 대신하자는 인사팀의 의견에도 이사장이 의견을 굽히지 않아 결국 상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표창 수여 일자가 내 퇴직 이후로 기록 되었다. 격으로 따지자면 장관표창이 더 나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신경을 써주어 생각지도 못했던 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만큼 본인과 일에 대해서 인정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직한 이유가 있다면.
점점 일하는 재미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사실 그동안 미뤄둔 숙제도 있었고 다른 꿈도 꾸고 싶었다.
KOICA의 역사와 수행사업을 기록을 통해 살피고 홍보할 수 있는 개발협력역사관 설치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주위에서 바라보는 기록관리 업무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역사관 설치사업과 더불어 추가 서고공간도 마련하게 되었고 서가와 각종 편의설비도 갖추게 되었다. 기록관리 업무를 몰입해서 수행 할 수 있는 독립된 사무실도 확보했다.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도 약속받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너리즘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재미만을 좇아서 일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혹시 퇴사 후 후회했던 적은 없나?
한 번도 없다. 결과적으로 정말 잘 놀았기 때문이다.(웃음) 퇴직금을 다 털어서 아내와 함께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를 돌았다. 좋았고, 행복했다. 퇴직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내와도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고, 우물 안 개구리였다가 개안을 한 느낌도 받았다. 그리고 미뤄둔 숙제도 마저 풀었다.
사람들은 내가 왔을 때 2주 안에 돌아갈 지, 2개월 안에 퇴직할 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할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워낙 그런 상황을 많이 봐서 놀랍지는 않았는데.
현 직장인 제주개발공사는 회사 이름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제주도에 있다. 가족이 서울에 있는 만큼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제주도에 대한 로망이 입사 지원 사유의 가장 큰 부분이었다. 화장실에 제주도 지도를 붙여놓고 지낼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교래리’라는, 제주도 내에서도 원시림이 밀집된 지역이 있는데 바로 그 곳에 위치한 직장에 가게 되어서 정말 좋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함께 깨달았다.(웃음)
제주도에 있는 기관이어서 시험을 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채용 과정은 어땠나.
좀 특별한 상황이었다. 전반적으로 인사비리 문제가 불거졌던 시점이어서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블라인드채용이 이루어졌다. 1차는 여의도에서 필기를 봤고, 2-4차까지는 제주도에서 면접을 봤다 (4차 면접에 대해서만 항공료가 지급되었다.)
첫 면접은 프레젠테이션 면접이었는데 심사위원보다 내가 전문가라는 사실이 면접시작 얼마 되지 않아 파악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피상적인 질문을 받았고 원론적인 측면에서 답을 했다. 최종 임원면접에서는 결국‘육지’로 돌아갈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뭐라고 답했을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웃음)
블라인드 채용방식으로 기록관리 담당자를 채용하다 보니 회사 관계자와 깊이 있는 면접이 오가지 못했다. 2-3차 면접은 외부인사가 진행했는데 그들은 회사의 속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기록학 전문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깊이 있는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공정함과 객관성 유지의 도가 지나친 나머지 무균실에서 청국장을 띄워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부 면접위원이 진행하는 블라인드 채용의 한계가 아닐까 한다.
다시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을 처음 뽑는 기관에 들어갔다. 처음 입사했을 당시 그 직무와 본인에 대한 기관의 인식은 어땠는지 듣고 싶다.
제주개발공사는 기록물 관리 문제로 몇 년째 골치를 썩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기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상태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기관에서 먼저 김익한 교수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전문가를 뽑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인사 부서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상태로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결국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을 채용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왔을 때 2주 안에 돌아갈 지, 2개월 안에 퇴직할 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할 수 있겠어요?’ 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워낙 그런 상황을 많이 봐서 놀랍지는 않았는데. (웃음)
지금 하고 있는 주요 업무 내용은 무엇인가?
기록물 정리에 시간 투입을 많이 하고 있다. 보조인력은 활용하는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적정 인원(4-6인)을 넘기지 않는다. 늘 기본적인 일에 가장 중점을 둔다.
다 접고 관두고 싶을 때가 있다면?
‘빨리 좀 해결하라’는 말을 들을 때다. 완전히 엉망인 상황에 직면하면 학부에서 들었던 고고학 수업이 떠오른다. 유적지를 발굴할 때에는 그리드를 치고 계획을 세우고, 가능한 자원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파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붓질과 솔질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논리와 맥락을 맞출 수 있다. 훼손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빨리 한다고 헤집어 놓기 시작하면 후에 돌이킬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정리만큼은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다.
얼마나 유능한 사람들이 얼마나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가가 그 분야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 아니겠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가 복제를 하면서 스스로를 단순 기능인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며 업이 유지되도록 하되, 새로운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오고 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일할 동료를 뽑을 수 있다면 어떤 면을 보고 싶은가?
짧고 굵게 일하는 사람. ‘몇 년만 일하고 가겠다’는 각오로 조직을 어려워하지 않으면서 일을 해낼, 그리고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갈 수 있는 사람을 뽑고 싶다.
앞서 한 말과 배치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이서 손을 붙잡고 장기적으로 가자’는 쪽은 아니다. 기록관리에 전반적으로 퍼진 매너리즘은, 기관에 들어가서 정년까지 쭉 있게 되는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정규직 확보는 이와 별개로 중요하다.
기록학계의 역사를 생각하면 본인은 중간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대학원이 생겼던 때와 지금,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차이가 있다면?
‘차이가 없다’라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10년 전과 지금,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시스템 위에서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갈라파고스 군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평화로울지 모르지만 조만간 우리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웃음).
얼마나 유능한 사람들이 얼마나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가가 그 분야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 아니겠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가 복제를 하면서 스스로를 단순 기능인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며 업이 유지되도록 하되, 새로운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오고 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말하기 조심스러운 내용이지만 활발한 이직 활동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기록공동체와, 기록학계에 들어오려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같은 질문에 대한 송영랑 선생님의 답변으로 대신하고 싶다(각주2 참조).
아울러 우리 스스로가 시스템/전자기록 분야에 너무나 취약하다. 현 상황의 기록관리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선배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너무 무지한 상태다. 자칫하면 기록학에 대한 이해 없이 시스템 운영 또는 정보관리 측면의 이해관계만을 따지는 사람들이 그들의 편의나 입맛대로 판 전체를 좌지우지 하거나 이용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럼에도 교육 현장에서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시스템 및 정보화 분야에서 학문적 배경 및 실력을 갖춘 후배들이 많이 고민하고 연구하여 산적한 기록관리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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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인용구 출처
임경선, 2018, “곁에 남아 있는 사람”, 위즈덤하우스, p. 245. 에서 가져와서 인용하였습니다.
각주2. 송영랑 선생님 답변 (전체 인터뷰 보러가기)
“예전에 내가 기록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쪽 업계가 블루오션이라고들 했는데, 요즘은 레드오션에 가깝다. 그래서 취업만을 바라보고 들어오는 학생들은 한 번 쯤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이미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학부과정이 없으니 석사과정이 공부의 시작이지 않나. 필수과목에 한해서라도 치열하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졸업 후 기관에 전문요원으로 들어가면 전문가로서 일을 해야 하니까. 기록연구직렬이 기관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전문연구자가 점점 많아져 함께,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