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이브를 바라보는 낯선 시선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최근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라는 프랑스 역사학자가 쓴 책을 읽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되었는데요. 문학과지성사에서 2020년에 기획한 인문사회 시리즈 ‘채석장’ 중 하나입니다. ‘채석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영화화하려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미완의 프로젝트에 훗날 알렉산더 클루게가 ‘상상의 채석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시리즈에 담긴 텍스트들이 사유의 파편을 모아놓은 창작 노트나 연구 노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프랑스 최고의 역사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를레트 파르주가 자신의 아카이브 취향에 대해 정리한 노트입니다. 18세기 형사사건을 연구하는 아를레트는 과연 오래된 아카이브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사유했을까요. 이번 편에서는 그가 발견한 아카이브의 특성을 저만의 방식에 따라 분류해보고 책의 구절과 코멘트를 덧붙여 보겠습니다.
아를레트 파르주는 처음 아카이브를 이용했던 경험을 소개하며 낯설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을 전합니다. 아카이브를 처음 접할 때 느끼는 흔한 감정 중 하나는 압도감입니다. 기록을 관리하는 사람도 때때로 아카이브라는 해일에 덮쳐 길을 잃곤 하는데요. 사전에 열람하고자 하는 기록물 목록을 충분히 조사하고 선별해뒀지만 몇백 년 전 문자와 언어 날 것 그대로 남아있는 기록은 평생을 바쳐도 끝내 다 읽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중압감을 줍니다. 누구도 해석해주지 않는 이 수많은 기록 앞에서 홀로 남겨진 아를레트는 고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카이브는 한편으로는 해일처럼 작업자에게 덮쳐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압도적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작업자를 고독하게 한다. ‘생동하는’ 존재들이 압도적으로 덮쳐올수록 그들을 모두 알아보고 역사로 써내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 (23)
아카이브가 처음 선사한 놀라움이 사라지면 무료함이 찾아옵니다. 저는 아를레트가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무료한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람실 한구석에 앉아 내내 하얀 종이에 까만 글씨를 베껴 쓰는, 지루한 수작업을 인내하는 과정입니다. 어떠한 편견이나 프레임 없이 기록이라는 바다를 표류하는 시간입니다. 기록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이 무료함의 단계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기록이 어떤 의미로 맺어질지 상상하지 못한 채 이 기록과 저 기록의 맥락을 그저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잇는 단계입니다. 세상의 어떤 위대한 일도 하찮은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과연 아카이브에 꼭 들어맞습니다.
“아카이브의 한 대목을 하얀 종이 위에 베껴 쓰는 일은 시간의 한 조각을 길들이는 일이다. 테마가 정해지고 해석이 정리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시작은 언제나 이 수작업이다. 시간이 걸리고 어깨와 뒷목이 뻣뻣해지기도 하지만,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이 수작업을 통해서다.” (27)
“작업은 시시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과정들을 통해 슬그머니 시작된다. 그런 과정들이 성찰의 대상이 되는 일은 거의 없음에도, 그런 과정들을 통해 전에 없던 연구 대상이 설정되고 전에 없던 지식 형태가 구성되고 전에 없던 ‘아카이브’가 구축된다.” (81)
열람실의 다른 이용자들과 안면이 트고 고정석 아닌 고정석이 생길 때쯤 이 무료함은 해석할 수 있는 어떤 패턴으로 변합니다. 아카이브라는 무한함이 창조성으로 전환된 순간입니다. 사소한 것과 비장한 것이 똑같은 일상적 어조로 펼쳐지는 이 아카이브에서 어느 날 아스라했던 과거의 실루엣이 선명해집니다. 무엇을 질문할지도 모르는 채 아카이브를 그저 즐기다가 마침내 역사적 존재 또는 질문과 마주하는 경험입니다. 아를레트는 이를 아카이브의 눈부신 디테일과 무한정한 내용을 즐기고 싶다는 감정과 아카이브에 정확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아카이브를 의미화해야 한다는 이성 사이의 긴장이라며, 아카이브에서 역사를 써내겠다는 결심은 이성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고 표현합니다. 이 창조성은 아카이브의 느린 작업을 참고 인내한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경지입니다.
저는 이 창조성이 아카이브의 일상성과 실재감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파리 형사사건 아카이브에서 여성, 빈민, 대중 행동의 주제를 연구해온 아를레트는 고발장, 재판기록, 심문기록, 수사기록, 판결문을 직접 필사하면서 18세기 프랑스 파리를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들을 만납니다. 아를레트는 연구대상 대부분이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투명했던 존재들이 시대라는 제약을 뚫고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존재에 보편성과 특이성을 동시에 부여합니다. 아카이브에서 재현되는 개인은 세상에 하나뿐이지만 시대를 통과한 개인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흔적을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아를레트는 역사학자로서 그러한 삶의 몇몇 순간들을 조명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종이 위에서 구겨지고 왜곡된 사람들을 평평하게 만드는 과정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카이브의 편파성과 불확실성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카이브는 역동하는 인물들, 작용과 반작용, 변신과 충돌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능동적 인물들을 엿보게 해준다. 아카이브에서 역사가가 할 일은 바로 그 역동을 포착하는 것,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들 안으로 파고 들어가 사회관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 추상적 범주에 집착하는 대신 그렇게 움직이고 시작되고 종결되면서 바뀌어가는 것들을 규명해내는 것이다.” (140)
“요컨대 단순한 역사, 안정적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카이브를 사회 관측기구로 삼을 방법은 조각난 지식의 무질서함을 받아들이는 것, 불완전하게 재구성된 불명료한 사건들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하는 것뿐이다. 작업자는 아카이브의 드문드문함 사이에서 없던 길을 터야 하고, 아카이브의 더듬거리는 답변과 불언으로부터 없던 질문을 만들어내야 한다.” (116)
아카이브의 편파성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를레트는 이를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면 안된다는 명령과 그럼에도 진실함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 사이에 난 좁은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적 진실이 오직 과거에만 매몰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아를레트의 조언입니다. 그는 단지 죽은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아카이브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의 어법으로 되살려내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역사는 결코 아카이브 베끼기가 아니다.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아카이브를 철거하는 것, 아카이브 앞에서 불안을 감추지 않는 것이 아카이브 취향이다. 역사가 어떻게 이렇게 아카이브에 좌초해 있는지 그 이유와 경로를 계속 질문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불안 덕분이다. 아카이브 취향은 아카이브에서 골라낸 하나에 머물고 있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 골라낸 것들을 하나로 엮고 싶은 마음이다.” (95)
이처럼 <아카이브 취향>은 아카이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단상들로 가득합니다. 오랫동안 아카이브와 호흡한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아카이브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아카이브의 필수요소 중 하나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좌초된 과거에 먼저 말을 걸고 의미를 끌어내는 작업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필수요소인 이상 아카이브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아카이브를 신성시하지 않아야 할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아카이브에도 추구해야 할 진실은 있습니다. 불완전함과 진실 사이의 ‘좁은 길’을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아카이브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