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을 하면서 힘든 순간 중 하나는, 직원들이 너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질문을 했는데 거기에 합당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입니다. 주요 업무인 평가에 있어서는 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의견조회를 하고 있는 이 기록관리기준 개정안이 전자결재시스템에도 반영이 되는건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당분간은 종이기록 평가.폐기에만 적용이 될거예요.”라고 대답해야 하는 때요.다양한 상황에서 법적 증거가 될 중요한 기록과 정보는 대부분 전자결재시스템이나 다른 업무 시스템에 있는 상황에서 종이의 양을 줄이는 데에 방점을 두고 평가를 진행할 때마다 회의를 느낍니다. 기관이 기록연구사를 채용해야만 하도록 강제하는 유일한 단서가 평가와 폐기인데 이런 식으로 계속 할 수 밖에 없을지 물음표가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89년에 발표된 베어만의 ‘Archival Methods’라는 글을 통해서요. 그래서 오늘과 다음 포스팅에서는 전자기록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왔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베어만(David Aaron Bearman)은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에서 1950년에 태어났고, 1971년에는 브라운 대학교에서 지성사로 학사 학위를, 1979년에는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81년에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컨설팅하면서 정보자원 관리부서를 신설하도록 조언을 했는데 그 후 바로 그 부서에서 커리어를 이어갔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Archival Methods는 스미소니언을 나와 독립연구자가 된 1986년 이후에 쓴 것으로, 그는 이 글을 통해 기록의 내용에 초점을 맞춘 평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기록이 어떤 기능에서 생산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Preface
Introduction: The Archival Endeavor
Chapter I: Selection and Appraisal
Chapter II: Retention and Preservation
Chapter III: Arrangement and Description
Chapter IV: Access and Use
Chapter V: Intelligent Artifices: Structures for Intellectual Control
Chapter VI: Recorded Memory and Cultural Continuity
‘Archival Methods’의 목차는 위와 같습니다. 베어만에 따르면 제1장부터 제4장까지 네 편의 에세이는 물리적인 기록의 관리에 포함되는 핵심적인 활동에 대해서 ‘현재의 방법이 적절한지 아닌지, 문화기관이 당면한 실무적인 한계 안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장 제목을 보면 그 네 가지 기반 활동은 선별과 평가, 보유와 보존, 정리와 기술, 접근과 이용입니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제4장까지 제기했던 변화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제6장에서는 아키비스트의 역할과 기록 행위의 본질을 살피고 새로운 시각을 밝혔다고 서론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한 번 더 들어가 볼까요? 이 글은 각 챕터에서 그 시기에 직면한 ‘문제’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기록학적 방법’을 제시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 선별과 평가에서 설명한 이슈는 이렇습니다. 모든 매체와 형식에서 기록이 만들어지는데, 통계를 보면 미국 사람들은 연간 450만 톤의 필기 용지와 4억 2천 5백만 개의 공 플로피 디스크(당시 기준 10만 기가바이트 저장 가능)를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TV 프로그램은 수십 개 채널을 통해 365일 24시간 송출되었고, 1억 9천 2백만 개의 공 비디오 테이프와 2억 6천 8백만 개의 공 카세트 테이프가 판매되었습니다. 매일 2억 4천만 통 이상의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구요. 그런데 아직 물리적 기록을 관리하는 데 중심이 있는 아카이브가 이 중 얼마나 소화를 할 수 있냐는 거죠.
그리고 기록학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우리의 선별 방법은 아키비스트가 아닌 사람들의 활동, 다른 문화 기관들의 보존(이게 도큐멘테이션 전략이 유효한 지점이긴 하지만), 그리고 의식적인 물리적 파괴가 가져오는 영향을 인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기록 평가는 그 무작위한 보유 결정이 지금부터 100년 간 미칠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고 말하며 기존의 기록 가치론과 도큐멘테이션 전략을 비평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글에서 베어만이 직접 자신의 의견을 ‘다위니즘적 평가’라거나 그 비슷한 말로 정의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찾아보니 베어만의 의견에 ‘다위니즘’이라는 말을 붙인건 제럴드 햄(F. Gerald Ham)이었는데요, SAA의 기초 시리즈 중 한 권인 ‘아카이브와 매뉴스크립트의 선별과 평가’를 집필하면서 ‘다위니즘’이라고 명명했고 이 때문에 우리가 ‘베어만의 다위니즘적 평가’라는 문구를 기억하게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베어만이 그 이후 발표한 논문들과 주로 해온 일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평가가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기 보다는,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기록학계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하려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Archival Methods’에서 자신이 제기한 평가 문제에 대해 스스로 제시한 답, 그리고 1994년에 ‘Archival Strategies’를 발표하며 추가로 이야기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문헌]
- Bearman, D. Archival methods. Archives and Museum Informatics 3, 28 (1989). https://doi.org/10.1007/BF02875892
- Luciana Duranti, and Patricia C. Franks. 2019. Encyclopedia of Archival Writers, 1515 – 2015. Lanham: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EBSCO 구독 기관에서 원문 이용 가능)
- Ham, F. Gerald. 1993. Selecting and appraising archives and manuscripts. Chicago, Ill: Society of American Archivists. (원문보기: https://hdl.handle.net/2027/mdp.390150241106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