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비스트가 말하는 아키비스트 인터뷰시리즈-24
우리는 특정한 자격을 지닌 기록’전문가’라는 존재로 기관에 들어가긴 하지만, 신입직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좌충우돌 하는 시기를 겪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기관과 그 기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내가 초반에 기록관리와 관련해서 내렸던 판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기관과 내 입장이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같이 들어간 다른 직원들의 승진과 인사 이동을 제3자로서 지켜보며 복잡한 마음에 휩싸기이도 하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기록연구사를 처음 채용할 때 들어가서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쭉 일해온 아키비스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기록연구사라는 직렬도 없던 시기에 기록학 공부를 시작하고, ‘나는 당연히 이 곳’이라 결정한 기관에 들어가고, 그 곳에서 아키비스트로서의 역할과 존재감을 키워온 통일부 김영경 기록연구관입니다.
- 일시 : 2023. 12. 5. (화) 20:30-21:50
- 장소 : 할리스커피(센터포인트점)
- 인터뷰 : 류신애
- 정리 : 류신애, 황진현
- (본문 중 괄호 안 설명은 인터뷰어가 추가한 내용입니다.)
본인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김영경이다. 통일부에 2005년에 입부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학부는 88학번이고, 대학원 석사과정은 98년에 졸업했는데 이 때 전공은 한국근현대사였다. 한말 일제 초 사회사를 전공했다. 졸업과 동시에 99년도에 기록관리 공부를 시작했고, 2005년에 통일부에 오게 되었다.
최근 일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에 “공공역사를 실천 중입니다” 라는 책에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아키비스트 챕터가 있어서 너무 반갑고 다행스러웠는데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서술 방향은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하다.
포맷이 이미 정해져 있는 책이었다. 공공역사연구소의 소장(이하나 대표)이 대학원 선배인데, 대학원 졸업 후 영화 쪽에서 일을 하다가 다시 박사 과정으로 들어온 분이다. 다른 곳에서 일을 했던 만큼 끊임 없이 역사를 토대로 학문 이외의 활용에 대해 고민을 했고, 역사를 전공한 학생들이 어떻게 지평을 넓힐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공공역사연구소를 만들었다. 작년에 ‘공공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나오면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여러 직업 스펙트럼에 대해 고민을 한 것으로 알고 있고, 공공역사문화연구소 개설 강의 중 기록관리 내용이 들어가기도 했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사람들이 역사 기반으로 어떤 쪽으로 일하고 있는지 – 학예연구사를 포함해서 PD, 작가, 학예사, 교사 등 다양한 직업군을 소개하는데 아키비스트, 역사 커뮤니케이터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포맷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사학과 학부생들 수준에서 직업의 세계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사학과 졸업 후 공부 뿐만 아니라 이런 직업을 가질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설명해주는 책이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24명이 공저한 책으로 2년 정도 걸린 책이었는데, 나중에는 내 포맷을 다른 저자들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맞춰달라’고 연구소가 이야기한 적도 있다.
사학과를 염두에 둔 책으로 나는 오히려 기록학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하는 것이 신기했다.
역사학 석사학위를 받으셨는데, 그 땐 기록학 대학원이 생기기 시작한 때다.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학예연구사가 아닌 기록연구사로 방향을 잡은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다. 1999년에 김익한 선생님을 비롯한 선구자적인 분들이 기록관리교육원을 만드실 때, 함께 하셨던 분 중 한 분이 내 지도교수님이셨다. 내가 박사 진학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지도교수님께서 나를 비롯한 몇 명에게 교육원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현재는 그 때 같이 들어갔던 사람들 중 나만 기록학계에 남아 있다. 지도교수님이 가장 크게 나를 이끄셨다.
기록학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지도교수님(고 방기중 교수)이 박사과정에 진학을 할 지 물어보실 때, 나는 역사학을 하면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기보다 역사학을 통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했고, 공부를 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쓰이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되도록 즉자적이었으면 했다. 1989년에 주진오 선생님께서 “실천을 위한 역사학”이라는 책을 번역하시고 나에게 특별히 주셨는데 그 영향도 있었다. 그러다 기록학을 알게되었고, 기록학에 역사를 녹여서 역사학에 활동성을 넣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당시는 기록학을 하더라도 취업의 길이 보이지 않았을 때인데
그랬다. 그래서 ‘(교육원은) 사기니까 그만 다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웃음)
대학원 졸업 후 통일부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다른 일들이 있다면
사기라는 말이 나올만한 배경이 있었다. 1999년도에 교육원에 들어갔더니 역사학/문헌정보학 분야에서 모인 70여 명의 석사 졸업자와 20여 명의 박사 졸업자가 있었다. 즉, 총 90명의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던거다 (웃음). 그 때 있었던 역사학계 사람들 20여 명 중에서 기록학계에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교육원이 학력 인정이 되지 않았었고, 인증을 받으려면 교육원에 재입학을 하고 논문도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었던게 크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수업을 다시 듣고, 등록금도 다시 내고, 논문도 써서 두 번 졸업을 했다.
교육원을 다니는 동안은 성공회대에 있는 민주화운동자료실(주: 2000년 ‘민주주의기념관 건립을 위한 민주화운동자료관 건립 준비모임’, 2000년 1월 ‘민주화운동자료관건립추진위원회’를 거쳐 2000년 4월에 ‘민주화운동자료관’ 개관)에서 인턴처럼 일했다. 그 당시 수집하고 정리했던 자료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많이 이관(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2000년 발의, 2001년 창립)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사람을 뽑았는데 난 떨어졌고, 대신 단기 기록물 정리와 분류하는 자리에 1년 정도 있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교육원 조교를 했다. 그래서 교육원 5-6기 분들과 친하다.

역사학을 통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했고, 공부를 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쓰이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되도록 즉자적이었으면 했다.

중앙부처에서 기록연구사를 처음 채용할 때 통일부에서 기록전문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 여러 중앙행정기관에서 거의 동시에 채용 공고가 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중 통일부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너무 당연하게도, 역사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육원도 대학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관별로 공고를 냈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지원한다고 하면 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선택은 재론의 여지도 없이 통일부였다. 내가 공부한 역사학 기반으로 무엇을 해볼 수 있는 곳은 통일부와 외교부 정도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통일부가 역사적 배경지식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이라 판단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통일부 내가 쓰려고 했는데!’ 하는 사람은 없었나?
있었다. 내가 쓸거니까 오지 말라고 했다 (웃음). 그리고 그 동기는 다른 기관에 들어가서 잘 지내고 있다.
지금도 기록연구사를 처음 채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관들이 많고, 그래서 기록연구사는 생소한 존재가 된다. ‘기록연구사’라는 신입을 처음 맞이한 기관의 반응과 기대는 어땠는지.
‘곤란한 골칫덩어리’ 업무인 정보공개를 시키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내가 첫 번째로 맡은 일은 불우이웃돕기와 상조회 관리였다. 막내 직원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내 소속은 총무과였는데 힘도 없고, 인사권도 없고, 예산도 부족했을 때다. 정보공개는 사서가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를 사서로 착각하는 직원들이 많다.
그런데 그 당시 기록연구사로 조금 일찍 기관에 들어갔던 조영삼선생님이 코치를 해준 게 있었다. 일단 들어가면 어리버리하게 가만히 있지말고, 업무계획서를 만들어서 올리라는 조언이었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서 업무계획을 작성하고 기록물등록대장에 올렸는데, 그렇게 했더니 전임자가 조금 놀라기도, 나를 경계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과장이 지시하지도 않은 문서를 만들어 보고도 하지 않고 등록한 것이니 매우 당돌한 행동이었다. 일부러 기록학 용어를 많이 쓰기도 했고. 하지만 내 업무는 사서와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결재를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먼저 문서를 작성해서 상사에게 보여주는 건 ‘이 사람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라는걸 보여줄 중요한 제스쳐가 되고,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게 할 수 있다.
처음 일할 때 제일 어려운 건 어떤 부분이었나.
업무는 매뉴얼대로 하는 것이니 괜찮았다. 힘든건 직원들과의 관계였다.
상조회 파일을 받은 적이 있다. 팀장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다른 직원이 하지 않겠다고 했던 상주회 파일을 주면서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정말 가지고만 있다가, 며칠 지나서 ‘제가 이거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다시 드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 일을 맡기려고 간을 보는거였는데, 내가 그대로 가져다 주니 ‘저 사람에게 상조회는 맡길 수 없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대신 바쁜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업무는 했다. 그건 일회성 업무이기도 하고 그 정도의 팀 일은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통일부에 있기 때문에 더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정말 많다. 특히 비밀해제자료 목록에 대한 요구도 있고, 국감 이슈도 다양하다.
내가 인턴으로 일할 때(인터뷰어는 대학원생 시절에 2개월 간 통일부에서 인턴으로 있었다)는 통일사료팀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직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지금은 사료팀은 없어졌다. 당시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그 전에 성공회대 민주화운동자료관의 관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통일부에도 사료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장관과 팀이 독대를 했던 기억이 있다. 순식간에 팀이 만들어지면서 북한자료센터에 있던 조직이 와서 사료팀이 되었고, 정권이 바뀌면서 1순위로 사라졌다.
조직이 비로소 정리가 된 건 2010년이다, 당시 직제를 담당하던 사무관이 기록관리를 어디에 두는게 좋을지 의견을 구하기에 기획조정실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고 물어보기에, 기록관리는 단순히 종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관들의 협조를 얻고 지도감독과 교육도 해야하기 때문에 문서수발이 아닌 행정관리의 영역에 있는 업무라고 설명했다.
기록연구사의 의견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맞다. 그 때부터 기록관리업무가 혁신관리 조직에 있다(기획조정실> 혁신행정법무담당관) 편제되어 있다. 이렇게 혁신행정 쪽에 기록관리가 포함되어 있는 기관이 내가 알기로는 국가인권위원회, 통일부, 외교부, 법제처 정도 밖에 없다.
그렇게 조직 편제가 바뀐 이후에 직원들의 업무 협조 태도가 조금 바뀌었나?
나는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보자료팀, 정보사회분석과, 서무계 운영지원과에서 업무 협조를 요청하는 것 보다는 기획조정실에서 뿌리는게 협조가 잘 되겠지.

내 선택은 재고의 여지 없이 통일부였다.

거의 20년 가까이 한 곳에서 기록연구사로서 일하고 있다. 처음 일할 때와 지금, 마음가짐이나 일할 때의 사고방식이 달라진게 있는지.
그러면 안되지만, 확실히 수세적으로 변한게 있는 것 같다 (웃음).
국립중앙도서관장을 하셨던 서혜란 교수님이 내가 통일부에 들어가던 당시 면접관이셨는데, 그 때 나에게 하셨던 질문 중 하나가 ‘위에서 어떤 기록을 계속 비공개 한다고 하면, 넌 어떡할래’였다. 그 당시에는 계속 설득해서 공개를 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는데, 그 질문이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 공개되면 안되는 기록에 대해서 고민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비공개를 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 때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이관 만큼은 공개 여부와 상관 없이 하고 있는데, 그렇게 이관한 비공개 기록 중 국가기록원이 기술을 너무 잘 해놓아서 사람들이 기록 원문을 확인하고 싶어할 만한 기록이 있었다. 애초에 그 기록을 이관했다는 것에 대해 상사로부터 한 소리 듣고 나서 기록원에 비공개를 거듭 요청한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면접에서 답하던 호기는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상사 이야기가 나왔는데, 기록연구사의 경우 긴 시간 동안 나를 둘러싼 사람들, 특히 상사가 계속 바뀐다. 설명하다가 지칠 때가 있지는 않았나?
맞다. 윗사람들이 계속 바뀐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모시는 분들을 내가 교육시킨다고 생각한다. 내 상사는 주로 4급인 과장인데, 그 분들이 나중에 실장, 국장, 차관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확실히 다른게, 기록관리 업무를 거쳐간 분들은 기록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보고드릴 때 금방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새로 오시는 과장님들께 매년 해야 하는 기록관리 업무 – 분류, 정리, 비공개기록 공개재분류, 전자기록 이관, 스캐닝, 평가심의 등 -을 매번 설명드린다. 그리고 기록관리평가를 위해서 기록관리 담당부서 부서장들은 기록관리 교육을 이수해야 하지 않나. 나를 보시면 ‘오늘 출근하면서 몇 시간 듣고 왔어요.’ 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착실한 상사들이다.
다행이다. 부서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언제부턴가 내 상사로 샤프하고 생각이 트여 있는 분들이 많이 오셔서, 내가 설득하기가 편해지기도 했다.
한 기관에서 일을 계속 하다 보니 사람들이 나를 인정한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주로 언제였는지.
해변가 모래밭에서 바늘을 하나 찾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다. 북한에서 조문단을 보낸다고 했는데 통일부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는거다. 그런데 그 때 통일부에 유사한 기록이 있었다. 정주영 회장이 사망했을 때 북한에서 조문단이 왔었던 것이다. 그 당시 기록이 남아 있어서 찾아 주었었다.
또 한 기관에서 오래 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물어보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12년 전 직제가 어떻게 되었냐 라거나, 몇년도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묻는 거다. 이게 나와 잘 맞는 일이라고 느끼는데, 기록을 찾아서 없으면 화가나고 필요한 기록을 찾아내서 제공해줄 때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문서가 필요한 상황일 때 그런 내용을 관련된 사건과 당시 조직, 업무 등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찾아야 할 지 추리를 하고 찾아내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고맙다는 말도 듣는다.
통일부에 들어온지 1년 만인 2006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난다. 기록관리혁신이라는 혁신과제가 생겼다. 그럴듯해 보이지 않나. 알고 보니 과제를 던져주고 나에게 시킨거였는데, 2년차였던 내가 전직원 400여 명을 대상으로 워크샵에서 발표를 했다.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데, 그 때는 ‘내가 이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다 교육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했다. 사람들에게 칭찬도 박수도 많이 받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두고 ‘저 사람은 어디에서 온 강사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금 연구관이신데, 인원이 늘지 않는 상태에서 연구관으로 승진하는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다. 기관에서 정말 확실하게 인정을 받았다는걸로 이해가 된다.
조직관리가 같은 부서에 있다 보니 오히려 내 승진에 대해 어필을 못했던 것도 있다. 그런데 15년 째 되니까 화가 나더라.
특히 중앙행정기관에는 고시 출신이 많고, 고위 행정직들이 많아서 속상할 때가 많았다. 일반직 안에서도 또 소외가 되는 소수 직렬이었고. 그리고 내가 기록관리를 교육했던 7급 직원들이 이제 사무관들이 되었다. 전 과장들도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가기도(다른 부서로 이동) 했다.
연구관 승진은 다른 사업과 연관성이 있다. 2014년부터 민간통일사료 수집사업이라는걸 통일부가 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업을 전담하기 위한 통일문화과라는 부서가 생겼다.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데, 당시 그 과에서 사업을 전담하게 된 사무관이 계속 나에게 수첩을 들고 와서 민간기록 관리에 대해 물어보고 갔다. 그 다음에 온 사무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내가 그 사업에 관여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과장이 나중에 혁신행정담당관 과장으로 오면서 통일부의 특수성과 그 사업을 발판으로 연구관에 지원해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통일부 직제규정을 찾아보았는데 내용이 매우 복잡하더라
맞다. 제일 좋은건 연구관 자리를 단독으로 만들면서 연구사를 새로 뽑는것인데, 그런 인원 순증은 택도 없다. 그래서 연구관 단일직제로 만들기 위해서 정말 많은 자료를 만들었고 직제 담당 사무관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일부러 복수직제가 아닌 단일직제로 추진했는데, 마지막에 결국 행정자치부에서 타 기관 사례를 참고하면서 총액인건비제 내에서 섞이는 복수직제로 가게 되었다.나중에 들으니 기관 내에서도 내부의 벽이 크긴 컸던 것 같다.
더는 여기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는지.
올해(2023년) 초. 사무관과 전화로 싸운 적이 있다. 지금 몸이 안좋은 것도 거기서 시작된 것 같다. 다 하기로 결정된 일인데 못하게 되었다.기록관리에는 하지 않으면 안되는 법령상의 일이 있는데 그 외의 일이 몇 가지 있었고, 내가 규정을 만들고 거기에 대한 찬반을 구하는 과정에서 내부 갈등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싶었다.
그 일 말고는 없었다.
박사학위 전공은 아니지만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북한학 공부를 많이 하셨다. 그 공부를 하기 전과 후, 기록을 다루는 데 있어서 달라진게 있는지 궁금하다.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앞으로 대학원을 가려는 분들이 있다면 자기가 속한 기관과 관련된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자기 기관과 관련된 모든 규정과 법률을 숙지하고 있기를 권한다.
민원서류철을 예로 들어보겠다. 이전까지는 기록물이 이관되면 목록만 슥 본다거나 보존기간만 기준표에 따라 처리했다면, 이제는 그 내용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민원 중 북한에서 한국으로 반입하는 물품에 대한 분쟁이 있다. 짚은 되고 가마니는 안된다. 모르고 보면 어떤 차이지 싶은데, 개발협력 수업을 들으면서 보니 통일부가 반입규정을 명시하는 근거가 있었다. 군사학, 평화학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처음 알았고 많은 새로운 지식을 알았다. 재밌었다.
그러면 혹시 박사논문도 그와 관련해서 쓸 예정인지
솔직히 일하는 곳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는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성미산 마을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마을공동체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했는데 현재로서는 마을을 대상화하는 논문을 쓰게 될 것 같아서 안될 것 같다. 마을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도 있다.

지금 기록학을 선택했던 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일을 할 것 같다.

후배 기록연구사를 뽑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은가
끊임 없이 자극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요즘의 기록학계 이슈나 새로운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역사학을 공부할 때 ‘학담’이라고, 공부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게 그리울 때가 있다.
혹시 정말 그런 후배가 들어오고, 원하는 예산을 다 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은?
근사한 아카이브. 특히, 법령에 저촉되지 않고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지 않아도 되는, 정보공개법과도 상관이 없는 그런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다. 예산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다.
이미 구축해 둔 디지털 아카이브도 공개하고 싶다. 이미 만들어 두었고 국가기록원에서 우수사례로도 뽑힌 디지털 아카이브가 있다. G클라우드를 활용해서 서버 비용도 들지 않았고, 2014년부터 기술해온 사료의 정보를 업로드하고 그걸 웹페이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상태다. 하지만 통일부라는 기관 특성상 비공개 사유에 해당되는 기록이 많아서 아직 오픈을 하지 못했다.
현재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일, 또는 애쓰는 업무 영역이 있다면
나에게 재밌는 일은 기록관리 루틴보다는 민간기록을 수집하는 일이다. 특히 구술기록 수집도 많이 하고 싶은데, 일단은 이미 수집한 구술기록을 어떻게 잘 서비스할 지 고민하고 있다.
지금 기록학을 선택했던 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일을 할까?
그럴 것 같다. 나는 일단 공부보다는 일이 맞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역사학 이외의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실천을 위한 역사학을 생각했기 때문에 학예직 보다는 기록연구직이 맞다고 생각한다.
10년 후 본인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글쎄, 성미산으로 돌아가서 마을 아카이빙을 시도하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 사는 곳에서 할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