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쩌면 전부인: 제주교육박물관 이정옥

아키비스트가 말하는 아키비스트 인터뷰시리즈-26


우리는 미래에 대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지만, 사실 쓰면서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삶에는 변수가 너무 많고, 이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의 다음 화(주1)’를 계속 써내려 가야만 합니다. 외부 요인과 상관 없이 내가 꼭 쥐고 있어야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요.

오늘 만난 인터뷰이에게는 그 원칙이 ‘전공을 절대로 버리지 말고 10년은 버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주교육박물관의 이정옥 학예연구사입니다. 커리어의 다음 챕터를 생각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선택을 내려 온 과정, 그 결과로 가게 된 곳에서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놀랍고 재미있었습니다. 그 10년을 훌쩍 넘긴 지금이 너무 좋다는 이정옥 선생님의 또 다른 10년 후를 기대합니다.


  • 일시 : 2024. 5. 3. (금) 13:00-15:00
  • 장소 :  폴 바셋 교보문고 강남점
  • 인터뷰 : 류신애
  • 정리 : 류신애, 황진현

한국사를 전공했고, 교육원 졸업 후 기록연구사 채용 시험에 바로 합격했다. 기록연구사로 9년 이상 일했고 학예연구사로는 만 4년 정도 근무했다. 

지금은 제주교육박물관에서 평생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사이버 제주교육박물관과 독도체험관도 관리한다. 교육을 기획하고, 강사를 섭외해서 홍보·운영하는 것이 주 업무다. 학생들을 인솔해서 역사유적지에 답사를 가기도 하고 진로 체험 교육도 하고, 복주머니 만들기 등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어제는 평생교육 통계 입력 작업을 했는데, 대학교 다닐 때 보험 삼아 따 놓았던 평생교육사 자격증이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박물관에 평생교육 자격 소지자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내가 있고, 심지어 평생교육 담당자인 상태여서. 

많이 다른 것 같다. 자료 관리를 담당한다면 기록관리 업무 경험을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텐데, 평생교육을 담당하니 중복되는 부분이 없다. 원래 교육 쪽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재미는 더 있다. 

교수 또는 학예연구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 석사학위 논문이 한성 도로정비사업과 부민(府民)의 반응에 대한 것인데, 이건 서울시사편찬위원회를 노린 주제였다. 그런데 논문을 쓰느라 자료를 찾으러 직접 가보니 대부분의 학예연구사가 계약직이어서 안되겠다 싶었다. 논문 주제를 바꿀 수 있는 시점은 아니어서 일단 졸업을 했다. 

박사 진학도 계획하고 있었는데 내가 졸업한 학교는 석사학위 논문 심사를 받고 있는 졸업 예정자의 박사과정 지원을 허용하지 않았다. 석사학위가 있는 상태에서 지원을 하려면 한 학기가 뜰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같이 일하던, 지금은 돌아가신 이영주 선배가 교육원을 권해서 졸업 한 달 후인 9월에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록연구사 채용 시험 스터디를 했는데 행정법을 공부하는게 너무 재미있었고, 공부할 수록 점수가 올라가는게 보여서 좋았다. 그리고 교육원 졸업인 8월 셋째주 바로 다음주에 시험 일정이 있는 경상북도 기록연구사 공고가 올라왔다. 당시 교육원은 졸업을 위한 시험도 있고 논문도 써야 했기 때문에 시험 공부를 많이 하지도 못했는데, 실제 문제 유형을 파악해야지 하고 본 그 시험에서 여섯 명 중에 세 명이 필기 전형에서 합격했고, 필기 전형 합격자 : 최종합격자 비율이 1:1이어서 무난하게 최종 합격했다. 그렇게 영양군청에서 기록연구사로서 처음 일하게 되었다.

맞다. 우리 기수가 총 11명이었는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교수님들께서 정말 열정적으로 강의를 해주셨고 안심도 시켜 주셨다. 그 때가 기록연구사 채용 공고가 많이 나기 시작한 시기 – 뽑기 힘든 시기가 겹쳐서 유독 눈에 띄었던 직종인게 아닌가.  

열한 명 중 사서/역사 전공자가 반반이었는데 사서들은 보통 직장이 있는 분들이 많았고 사학을 전공한 분들은 과거사 위원회도 정리되던 시기여서 취직을 준비해야 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몇 명은 일찍이 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지역 합격자는 그 다음 해부터 출근을 했는데 나만 11월 중순에 바로 첫 출근을 했다. 영양군은 서울에서 다섯 시간 걸리는 곳에 있는데, 처음 몇 달은 집에 가지도 못했다.

첫 출근을 한 당시에 바로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해서 한 달 간 11시까지 사무실에서 비상근무를 해야 하는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했다. 그 후에는 바로 구제역이 돌아서 세네 달 동안을 한 달에 100시간씩 연장 근무를 했다. 그게 끝나니 한 달 간의 산불 계도 기간이 돌아왔고, 그 후에는 축제가 있어서 정말 쉬지 않고 일했다. 같이 일했던 계장님조차 자신은 공무원 생활 30년 통틀어 처음 겪는 일을 신규 석 달 만에 겪는다고 불쌍하다고 할 정도였다. 

힘든 시기였지만 다행히 영양군에서 같이 일하는 분들이 정말 좋아서 잘 지낼 수 있었다. 특히 바로 옆자리에 있는 동료와 하루 종일 함께 하며 버틸 수 있었는데 그 직원마저 개인 일로 병가를 쓰게 되면서 많이 힘들어졌다. 그 즈음에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교육원 재학 중에 계약직으로 근무했던 민주화운동사업회가 특별한 계획 없이 퇴직한 유일한 전 직장이다. 일도 좋고 배우는 점도 있었지만 계약직이어서 아쉬운 점들이 있었고, 기필코 정규직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일도 겪었다. 덕분에 전업 수험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영양군에서 정규직인 기록연구사 자리를 그만 둔 것은 돌이켜 보면 내가 어렸기 때문이었다. 반 년 넘게 이어지는 과다한 업무에 많이 지쳐 있던 상황에서, 심지어 제일 친한 동료까지 병가를 들어간 시점에 임기제 기록연구사 자리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서울 공고도 있었지만 제주도에서의 삶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 업무 분장에 정보공개-나는 그 때 정보공개 업무로 많이 소진되어 있는 상태였다-가 없는 것도 매력적이어서 제주시청을 선택했다. 

제주시청은 서고 관리 담당 공무직도 따로 있고 예산도 확보 되어 있어서 기록관리를 체계적으로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지만 계약직이다 보니 불안한 점이 있었다. 그 때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서 정규직 기록연구사 채용 공고가 났고, 시험을 준비해서 옮겼다. 

교육원에서 공부할 때 임진희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5년, 10년, 3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라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 때 내가 ‘5년 뒤에는 제주도에서 기록연구사로 일하고 싶다’고 썼다. 그 목표를 5년 내에 이루어 냈다. 

일도 좋고 배우는 점도 있었지만 계약직이어서 아쉬운 점들이 있었고, 기필코 정규직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일도 겪었다. 덕분에 전업 수험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우선 시스템이 된다는 가정 하에 전임자 이름으로 검색되어 나오는 공문을 다 본다. 그게 되지 않으면 다른 유사 기관에서의 내 업무 관련 공문 찾아본다. 예를 들어 제주교육박물관에 첫 출근을 했을 때는 국립중앙박물관 등 다른 기관의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찾아 보았다. 

그리고 다른 기관이 업무로 받은 표창 내역을 찾아보고, 내가 있는 기관에서 할 수 있는 업무를 정리하고 예산을 신청해 보기도 했다. 기록관리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업무이고 루틴에 매몰되기도 쉬운데, 그렇게 하면 남들이 하는 만큼은 할 수 있다. 다른 기관의 사례를 보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된다. 국가기록원에서 일할 때 가장 자극을 받은 건 함평에 기록관리교육을 하러 갔을 때였다. 기록관도 별도 건물로 지어져 있고, IT를 활용해서 수집한 기록을 바탕으로 영상을 만들어 전시와 홍보도 하고 있었다. 

찾아서 먼저 하지는 않는데 위에서 시키면 열심히 하고, 그게 티가 많이 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하필 일복을 타고 나서, 제주도교육청과 교육지원청 모두 내가 있을 때 청사 리모델링을 했다. 30년 만에 하는 거였는데. 

서고 면적이 크니 리모델링을 할 때 시설과 담당 팀장님들이나 현장소장님과 업무 협의를 할 기회가 많았다. 나는 “서고 증설 하는 김에 자동식 소화 설비도 해 주세요. 기록관이 지하에 있어서 이관 받을 때 직원들이 힘드니 엘리베이터를 지하까지 연결되게 해 주세요.”하고 요청했을 뿐이다.

서고 증설 필요성으로 학교 중요기록물 이관을 근거로 제시했기 때문에 이관도 받아야 했고, 이왕 하게 된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기록이 중요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제주도교육청에 발령 난 다음 해가 ‘교육자치 50주년’이어서 제주교육박물관에서 기획 전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걸 내가 하게 된 것이다. 그 전시에 과장님들은 물론 교육감님도 와서 보시고 흡족해하며 돌아가셨는데, 그 때 ‘기록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내가 뭘 하겠다고만 하면 다 통과되었다. 특히 기록관리 교육에 공을 들였다. 교사 연수, 교감 자격 연수 등에도 기록관리 교육을 1시간씩 넣었고, 신규 공무원 연수 교육은 모두 갔다. 교육을 많이 하다 보니 요령도 생겨서 교육 효과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도 있다. 제주도교육청에는 행정직을 포함해서 총 50명이 같이 임용이 되었는데, 학교 등 다른 곳에 발령이 나서 일하는, 막내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관 기록관리 업무를 맡게 된 동기들이 SOS를 보낼 때 직접 가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관계 기관 협조도 잘 되었다. 시간이 지나니 그들의 위치도 달라지고.

기록이 중요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제주도교육청에 발령 난 다음 해가 ‘교육자치 50주년’이어서 제주교육박물관에서 기획 전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걸 내가 하게 된 것이다. 그 전시에 과장님들은 물론 교육감님도 와서 보시고 흡족해하며 돌아가셨는데, 그 때 ‘기록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내가 뭘 하겠다고만 하면 다 통과되었다.

일단 성남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국가기록원의 영구기록관리 업무 관련 부서가 성남 나라기록원에 있었고, 거기서 학예연구 자리가 나왔다. 역사학 석사로 학예연구에 지원하면서 기록연구사 경력을 우대 사항에 넣는, 합격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당시 남편과 나 모두가 육아휴직 중이었다 보니 가계 경제를 위해 빨리 다시 일을 했어야 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도 육아를 하는 와중에 바쁘게 준비했다. 

국가기록원에 처음 가서는 전거와 시소러스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일을 한 달 정도 했다. 당시 원장님께서 차세대 AMS 개발에 관심이 많으셨고, 업무 설명 및 기능 요구 분석을 담당자가 상세하게 작성해서 업체에 전달하길 바라셨다. 당시 전거와 시소러스는 각각 다른 사업으로 발주되어 별도로 구축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에 대한 통합 관리 방안이 필요했는데, 이에 대한 발표를 들어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원장님 포함하여 100여 명의 직원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했다. 

쭉 맡았던 업무는 국토교통부와 해양수산부 기록에 대한 공개재분류와 재평가, 분류기술이었다. 이 중 공개재분류의 경우 발주를 하는 사업이다 보니 일정이 정해져 있는데, 국토교통부는 업무 유형과 비공개 사유가 다양한 편이라서 확인해야 하는 내용이 많다 보니 늘 숨이 차게 일했다. 일단 퇴근을 한 후에 집에 가서 새벽 2시까지 일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재평가는 연말부터야 겨우 손을 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여러 기관으로부터 전화도 많이 왔는데, 내가 지자체 연구사였을 때 국가기록원에 문의를 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되도록 전화를 담당 부서로 돌리지 않고 가능한 선에서 대답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지방자치단체에 있을 때에는 수량이 많아도 어렵지 않은 업무였는데, 국가기록원에서 재평가를 맡게 되니 큰 부담이 되었다. 기관에서 국가기록원으로 이관을 할 때 그 기록물이 폐기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 단계에서 폐기되면 정말 없어진다는 생각에 보존기간이 짧은 기록물도 한 건씩 일일이 확인했다.

폐기한다고 해서 서고 공간이 티가 나게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후임자에게도 재평가는 하되 폐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심의 결과가 폐기가 아니더라도 재평가가 필요한 것은, 심의 과정에서 재평가 대상 문서 한 건 한 건을 모두 찾아보게 되는 과정 자체가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있는지도 몰랐던 기록을 인지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고, 분류기술 정보를 실물과 대조해서 확인할 수도 있다는 의의가 있다. 

검색개선팀에서 일할 때, 한 이용자가 어떤 기록에 대해서 ‘국가기록원 색인목록에는 있는데 검색을 해보면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는 문의를 해온 적이 있다. 그 분은 현 증권거래소인 ‘조선취인소’ 법령 초안을 찾고 있었다. 평가 이력을 확인하려면 ‘일정시대 문서정리 심의평가서’라는 문서를 찾아야 했는데 그 문서는 대장류이니 B4 크기 문서일 것으로 추정하고 일단 서고의 정부기록보존소 총무과 영역 중 B4 크기 문서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내 짐작이 맞아서 그 기록을 찾았고, 조선취인소 법령 초안 그 문서가 폐기로 결정되었다는 근거를 찾았다. 그런데 보통은 폐기로 결정될 문서가 아니어서 평가 내역을 추적해보니 1960년대에 전쟁을 대비하여 일부를 마이크로필름화한 후 원본을 폐기한 문서 중 하나였다. 광화문 센터까지 가서 일부 문서가 30여 개 롤에 걸쳐서 남아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몇 달에 걸쳐서 틈틈이 했던 일인데,  정말 바쁜 와중에도 그 일이 즐거웠다. 시간이 있다면 80년대의 마이크로필름화 내역을 다시 확인해보는 작업을 해보고 싶을 정도로. 

어느 기관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니 정책도 조직도 많이 바뀌었다. 이소연 전 원장님께서 행정안전부에 증원을 요청하는 노력을 정말 적극적으로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게 특별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9년과 2020년에 공고도 많이 났고. 

국가기록원에서 일하는 동안 직속기관의 한계도 많이 느꼈다. 소속기관이 아닌 외청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은 가장 흥미가 가는건 취업상담사인데, 찾아보니 주로 비정규직으로만 공고가 나서 안될 것 같다. 다양한 형태의 채용 시험을 경험해 보아서 필기시험과 서류 준비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고 주고 싶어서, 가끔 네이버 기록관리 카페에 누가 고민을 올리면 댓글이나 쪽지를 쓰기도 한다. ‘그런 성향이면 기록연구사는 잘 맞지 않으실거다’ 라든가.

내가 석사를 졸업할 때 즈음에 내가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작은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절대로 전공을 버리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 10년은 버티면 갈 길이 보일거라고. 그 이후 쭉, 그 말이 내가 일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다. 

재직 중인 제주교육박물관의 야외 초가

면접 자체가 늘 어렵다. 서류는 계량화가 되는 부분이 있으니 자격증을 미리 따 놓는다든가 시험 과목 중 약한 부분을 특별히 열심히 공부한다든가 하는 대비를 할 수 있는데 면접은 그렇지 않아서다.

대신 직무수행계획서를 관련 논문도 다 찾아서 읽어가며 정말 열심히 썼다. 어떤 기관에서는 면접관에게 ‘직무수행계획서를 정말 잘 썼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합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계속 서류 단계에서 합격하다 보면 언젠가 면접까지 가고 최종 합격까지 갈거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보았다.

일단 나는 지금이 너무 좋다. 

10년 전 기록연구사로 처음 일할 때, 같은 과 분들이 다른 과에서 무시 당하지 말라고 ‘이 직원은 연구사이고 6급 상당이다’라고 말해주셨었다. 어느 날 혼자 일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직렬 7급인 남자 직원이 대뜸 와서 ‘네가 무슨 6급 상당이냐’고 성을 내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 때 ‘딱 열 살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눈을 떠 보면 마흔 정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나이면 어디에서도 무시 당하지 않을 것 같아서. 10년 후인 지금 실제로 좋은 면이 많다. 일단 어디에서 쉽게 무시 당할 일도 없고, 그런 일이 있더라도 내가 괘념치 않는다. 

10년 후를 생각하면, 일단 그 시점에는 박사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하면서 살았던 편인데 박사는 아직까지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있다. 10년 후에는 수료라도 하고 싶다. 

그리고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은 채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 때도 제주도에서 일하고 있다면 4.3 기록물과 관련해서도 필요한 일을 하고 싶다. 국가기록원에서의 경험을 살려서.

주1. 김이나, 2020, 보통의 언어들, 위즈덤 하우스 [전자책 (밀리의 서재)] 에서 인용.

주2.  2011년 2월 22일 개정, 2011년 5월 23일 시행. 부칙 제2조에 따르면 영 시행 당시 교육과정을 이수 중인 사람까지는 이전 조건을 따름.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