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류장, 나의 기록관리: 중앙대학교 박효은

아키비스트가 말하는 아키비스트 인터뷰시리즈-27


입시, 시험, 취업, 승진 등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 순간 중 힘들고 좌절할 만한 시기들은 언제나 있는 것 같아요. 나만 느린 것 같고, 주변 친구나 동기들은 금방 자리를 잡는 것 같기도 하구요. 사실 대학원 졸업 후 법적 자격을 갖추면 그 기쁨은 잠시이고, 나라는 존재를 어딘가에 세우기 위해 분투하는 시간이 길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나를 어떻게 다독이셨나요?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나의 정류장이 어디엔가 있을거란 믿음으로, 함께 탄 이 버스에서 누가 먼저 내린다 하더라도 기쁘게 인사해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더라구요. 여러분의 정류장은 어디인가요?


  • 일시 : 2024. 6. 14. (금) 19:30-21:00
  • 장소 :  투썸플레이스 국회의사당점
  • 인터뷰 : 황진현
  • 정리 : 황진현, 류신애

박효은. 중앙대학교 총무팀에서 기록연구사로 근무한 지 5개월차다. 중앙대학교에서 기록연구사를 채용한 것은 처음이다. 모든 것을 처음 하는 시점이어서 각 부서 기록물관리담당자 선임을 먼저 했고, 기록관리 계획을 세우고, 기록관리를 전공하지 않았던 전 직원이 만들어둔 기존 규정을 개정하고 있다. 서고도 만들고 기록물분류기준표도 구축하는 중이다. 

학교이기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오는 에너지도 있지만 일하는 환경이 다소 딱딱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 부서는 분위기가 좋기도 하고, 모교이기 때문에 적응이 빨랐다.

고등학생일 때였다. 어릴적부터 아버지가 문화행사에 자주 데려가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국가기록원에서 주최하는 기록백일장이었다. ‘나의 기록에 대해 써보기’ 같은 주제로 백일장이 열렸는데, 중학교 때 참여하게 되면서 기록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기록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면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니 너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내내 생활기록부에도 기록관리를 하고 싶다고 적었다. 문헌정보학을 공부하다 보니 기록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기록관리를 하고 싶어서 문헌정보학과에 진학한 것이다.

대학 진학을 학생부종합전형으로 했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기록관리를 하고 싶었다는 스토리도 만들고, 경험도 쌓아 면접에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3년 내내 기록전문가(기록연구사)를 진로희망으로 적었다.
처음엔 ‘국가기록공무원’ 이었던 명칭이 ‘기록연구사’로 바뀌었다.

그 당시에는 현재의 기록을 미래로 남기는 직업이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좀 더 현실적으로 주변에 설명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주민센터에 갔는데 등본 없다고 하면 어떡하나?’ 처럼 실생활과 연관지어서 설명해주려 한다.  

기록학 대학원 진학을 위해 문헌정보학을 선택했다보니, 학부보다 대학원 수업이 더 기대됐다. 학부에서는 김유승 교수님의 ‘기록학개론’ 수업 하나 뿐이어서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학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야 ‘아, 내가 이걸 배우러 지금까지 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학부 재학 중에는 기록학 소모임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공부하기도 했다. 내가 졸업한 후에는 소모임을 이어나갈 후배를 찾지 못해 모임이 사라지게 되었지만, 1년 동안 즐겁게 공부했다.  

4년 동안 문헌정보학과 수업을 듣고 대학원에 와서 기록학 수업을 듣게 되어, 문헌정보학에서 사용했던 단어와 이론과는 다른 점이 많아 생소했다. 기록학은 문헌정보학과는 아예 다른 학문이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학부 1학년에 다시 온 것 같은,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분류처럼 문헌정보에서 배웠던 부분과 유사한 지점도 있었지만, 깊게 들어갈 수록 기록학이 문헌정보학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학원 생활은 학부 때부터 함께 다니던 동기가 있어 서로 으쌰으쌰 하기도 하고, ‘과제 어떻게 해~’ 서로 하소연 하기도 하며 재밌게 잘 다닌 것 같다. 중앙대는 문헌정보학과 안에 기록관리 전공이 있음에도, 기록학으로만 석사 수업을 모두 채울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이경래 교수님이 해주셨던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록의 분류·기술과 검색도구’라는 책을 바탕으로 발제와 토론을 했는데, 토의를 깊게 하는 수업이라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대학원 생활은 즐거웠지만 논문 학기는 너무 괴로웠다. 졸업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졸업을 해야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데, 이 논문이라는 큰 산을 내가 넘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주제로 ‘다크 아카이브’를 가지고 학위논문을 썼는데 국내 연구자료 뿐만 아니라 해외 연구자료도 적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대학원 1-2학기 때에는 조교를 병행하며 학교를 다녔고, 3학기부터는 (사)한국기록전문가협회에서 반상근간사로 일을 시작하여 대학원 생활을 병행했다. 협회에서 매년 여름방학 때 운영하는 ‘기록의 숲'(구 여름 학습반)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직접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기록의 숲은 대학원생이 대상이기 때문에,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기획한 것이라 애착이 많이 갔다. 코로나 시기여서 첫 온라인 진행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참여도가 꽤 높아 다행이었다. 

협회의 ‘기록의 숲’, ‘아키비스트 캠프’를 직접 기획하고 운영했다.

대학원 1학기를 마친 후 아키비스트캠프에 참여했었는데, 당시 북키비스트라는 코너에서 책을 받았었다. 그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기도 했고, 조교와 병행 가능한 파트타임 일이 필요한데 시간이 잘 맞기도 했다. 당시 협회에서 홍보를 담당할 반상근 간사를 모집했는데, 학부 때 했던 홍보대사의 경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대학원 공부를 한 학기 더 하게 되었는데, 협회에서 마침 상근간사 제의를 해주셔서 자연스럽게 근무를 이어 나갔던 것 같다. ‘기록의 숲’ 처럼 ‘아키비스트 캠프’를 준비하기도 하고, 큰 덩어리의 일을 직접 기획하고 구성, 운영하는 것들이 배울 것도 많고 재밌기도 했다. 카르마레터,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등도 재미있었던 일들 중 하나다.  

나는 한 기관의 기록연구사로 일하는 것이 목표이긴 했으나, 협회원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거나 기록을 활용한 서비스를 하는 일들을 하면서 ‘기록관리 전공자가 이런 일들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시야가 넓어져서 좋았다. 공공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공부였는데, 협회에 오니 다양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여러모로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협회에서 나와보니, 회원의 입장에서 아쉬운 점들이 보이긴 했다 (사실 어쩔 수 없다는 점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무엇보다 홍보는 해도 해도 부족하구나!를 실감했다. 기관에서 내 일을 하다 보니, ‘아 이 행사가 이 때 있었지!’ 하며 잊어버릴 뻔 한 일이 많았다. 협회에서 일 할 때에는 너무 잦은 홍보가 소음처럼 느껴질까 조심스러웠는데, 홍보를 많이 해도 회원들에게 닿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요즘에는 채널도 다양하기도 하고, 또 학교마다 협회나 학회의 행사를 공유하는 정도의 차이도 있는 것 같다.  

학생 때에는 협회나 학계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가는 것이 정보를 얻는 측면에서 유용하기도 하고 시간도 있었는데, 취업을 한 이후에는 참여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시간을 내기가 어렵기도 하고, 출장을 내는데 부담도 있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협회가 취업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하기엔 너무 큰 부분이었다. 많이 배우기도 했고. 만약 협회에서 배우지 않고 바로 기관에 들어갔다면 무너지는 순간들이 많았을 것 같다. 보고, 듣고, 배우고 난 후 취업을 하니 (아직도 무르긴 하지만) 좀 더 단단해졌다. 애정이 많다. 

출근 3일차에 이상함을 감지했고, 일주일 차에 이직을 결심하고 공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입사 시 예정되어 있던) 나와 내 동기들의 정규직 전환도 되지 않았고 다른 신규 채용도 전면 중단되는 등 기관의 경영 상의 문제가 심각해서 전체적으로 기관 운영의 불안함이 컸다. 직원 구성도 좋지 않았다.

기록관리 직무도 문제가 많았다. 들어가기 전에는 전체 업무 100 중 30만 기록관리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워낙 기록관리 업무를 할 수 없는 기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 기관은 0이었다. 총 11개의 업무를 맡았는데 그 중 10개는 타 업무, 하나가 기록관리 업무였다. 직원들 급식비, 전화비 등 공공요금 납부 업무로 너무 바빠, 정말 기록관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 오랜만의 신입 채용이라 총무, 서무의 일이 몰리기도 했고 업무가 너무 자질구레해서 실망감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기록관리 계획안을 작성해 팀장님께 보고하러 갔는데, ‘너 업무 할 시간도 없는데 이걸 왜 했냐’는 이야기를 하며 읽어보지도 않으셨다. 그 순간 ‘아, 여기는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운이 좋게 금융위원회로 이직하게 되었지만, 이직이 결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퇴직일은 마음으로 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일단 선배가 연구관/연구사 둘이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든든함이 있었다. 연구관님과 연구사님은 본부에 주로 계시고 나는 서고에 있어 일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시키시는 일을 하면서, 또 피드백을 받으면서 많이 배웠다. 연구관님은 기록관리 업무를 총괄하시고, 연구사님이 기록관리 일 전반을 수행하셨는데 나는 주로 그 업무를 지원하는 일을 했다. 이관이나 평가 폐기를 돕는 일 등이 대표적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나의 기록관리를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다.

신기했다. 또 금융위원회는 오래 전부터 기록전문가가 존재했던 기관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기록관리 프로세스가 체계적이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고. 금융위원회 자체의 업무가 있으니, 금융실명제, 은행 승인 관련 자료 등 한국 금융 정책을 알 수 있는 굵직한 자료가 많아서 신기했다.  

아무래도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직장에서 나의 기록관리를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록을 활용하는 일(서비스)을 해보고 싶은데, 금융위원회에서 내가 하고 있는 업무는 그 부분은 아니었기에 이직을 결심했다. 그럼에도 이직을 했을 때 ‘전 직장 같은 곳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많았다.

중앙대학교에서 이전에 기록물관리전문요원 자격을 가진 사서를 채용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이 도서관에서 주제전문사서로 근무하고 계신 터라 총무부에서 기록관리를 전담할 인력이 필요했고, 이후 내가 기록연구사로 첫 채용되었다. 2022년 기록연구사 정규적 공고가 나갔는데 계속 채용이 안되다가 2024년에서야 내가 채용된 것이다. 평가/폐기 등의 기록관리 업무가 밀려있던 터라 직원들이 기뻐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기록관리를 하라고 푸쉬(?)하는 분위기다. 아주 세세한 업무를 지시하지는 않지만 서고  만들기 등 기록관리의 큰 업무 덩어리를 해야한다고 요구하는 상태이고, 그래서인지 업무 선후관계 없이 한꺼번에 일을 받는 느낌이기는 하다. 그래도 첫 직장의 트라우마 때문인지(웃음), 기관의 강한 기록관리 의지가 아직까지는 행복하다! 

처음인 만큼 전체적인 기록관리 프로세스를 잘 짜고 싶다. 계획부터 시스템 구축, 활용까지 기록관리 라이프사이클을 탄탄히 구축해나가기 위한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만들고 싶다. 

문서배부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출근 후 워밍업(?)으로 대외문서 발송과 배부를 하고 있다. 그 후 기록관리 업무를 한다. 

내가 이 취업이라는 차를 타고 갈 때, 차가 막힐 수도 있고 도로가 무너져 돌아갈 수도 있지 않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먼저 취업을 할 때에도 그 친구는 자신의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이니 축하해주고, 나는 나의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다독였다.

강점이라 한다면 입사하고자 하는 그 기관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는 점, 그리고 그 장점을 기록관리와 연계했을 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필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A기관의 경우는 지자체 시민들이 오랜 시간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 결과 설립된 기관이기에 그러한 히스토리를 면접에서 강조했다. 중앙대학교의 경우에는 100년의 역사가 있고 모교이기도 하니, 나의 애교심을 바탕으로 역사 기록을 서비스하여 학교의 발전에 기여하고 학생들에게 애교심을 심어주고 싶다는 것을 강조했다.  

약점은 아직 경력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면접에서도 이전 기관에서 무엇을 했는지,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을 질문 받았다.   

공공기관 면접을 볼 때면, 기록관리 외에 다른 업무를 같이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항상 받는다. 사실 할 수 있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서도 이 기관에 들어가면 기록관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씁쓸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난해했던 질문은 ‘장점을 일곱 글자로 말하라’ 였다.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웃음) 

사실 정말 지원을 많이 했다. 그리고 많이 떨어졌다.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마다 목적지도 있고 경유지도 있을텐데, 내가 이 취업이라는 차를 타고 갈 때, 차가 막힐 수도 있고 도로가 무너져 돌아갈 수도 있지 않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먼저 취업을 할 때에도, 그 친구는 자신의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이니 축하해주고, 나는 나의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다독였다. 정류장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좋아하는 취미 생활 하면서 버텼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이 되지만 얘기한다면 오픈채팅방 등을 보았을 때, ‘우리가 배운 것은 A, B, C 이기 때문에 이것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는 만큼 다양한 기록들이 생산되기 때문에 이들을 잘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치를 다같이 키워나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다같이 배워서 우리의 파이를 넓혀가면 좋겠다.   

설레었던 장면! 기록관리를 배우기 전, 국가기록원 서고 견학 등을 가서 서고를 보면 너무 설렜다. 

뭔가 멋있다. 웅장하고! 

특별히 화가 나는 일은 아직은 없었지만, 기록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이거 별 거 아니니까 이거나 해,  하지마’ 라고 할 때? 업무를 떠나서 상대를 존중하다면 그런 발언을 할 수 없지 않나 싶다. 내가 더 공부하고 시간을 투자해서 더 나은 현명한 기록연구사가 되어야지! 라고 생각한다. 

10년 뒤면, 39세다. 좀 더 단단하고 현명한 기록연구사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그 때 쯤에는 중앙대학교 기록관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애교심을 심어주는 공간으로 꾸려 나가고 싶다. 


협회에 공부와 상관 없는 친목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꽤 들어온다고 한다. 협회에서 협회 상근 근무자가 아닌 사람 = 나에게 한 번 모임을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고, 평소 보드게임을 좋아하기도 또 다 같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해서 동아리로 만들어보았다. 동아리 이름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아보카도로 정했다. ‘아키비스트 보드게임 동아리’의 아보에 뒤에 카도는 그냥 붙였다(웃음). 나중에 다른 모임 자리에서 한 분이 카도를 ‘카드 아님! 도박 아님!’으로 하라는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주: 이 분의 이미지를 지켜주기 위하여 실명을 가렸습니다). 

올 해 초 확정이 나서 8명이 모였고, 지금까지 잘 활동하고 있다. 한 달에 세 번 정도 만나고 있다(2주에 한 번 평일, 주말 한 번)!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게 보드게임만 했는데, 자주 만나고 친목도 쌓이다 보니 연구도 해볼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다양하게 가지를 뻗을 수 있을 것 같다. 또 학회나 행사 등에 가서 친숙하게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좋다. 학계에 친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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