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는, 정말 그만 하고 싶은 일

아키비스트라운지 인사이트 아웃 #1 평가심의를 평가합니다 – 1


아키비스트라운지 두 명의 에디터가 매일 나누던 카톡, 그 속에는 기록전문가로서의 고민과 솔직한 속마음도 날 것으로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대화 중 밖으로 꺼내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건져내 보았습니다. 라운지의 새로운 시리즈, ‘인사이트 아웃’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평가심의를 평가합니다’입니다. 기록전문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인 평가, 그 이면에 숨겨진 고민을 두 사람의 교환 편지 형식으로 연재합니다. 오늘의 첫 번째 글과 내일 올라올 두 번째 글은 기록과 사회에 먼저 업로드하며, 세 번째 글 부터는 매주 목요일에 아키비스트라운지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진현에게


3월 3일! 1월 1일, 구정 설에 이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마지막 시작 지점이야. 개강 첫날은 어떻게 보냈어? 나는 오늘에야 미루고 미루던 기록물평가심의회 개최 기안을 올렸어. ‘2026년 제1차 기록물 평가 및 폐기 계획()’ 문서에 쓴 추진 일정()에 따르면 지난주에는 끝냈어야 했던 일이지. 매번 엇비슷한 답답함과 제각각의 괴로움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진력이 나는 건 처음이었어. 내 업무 클라우드에서 평가와 폐기 폴더를 열어보니 이 기관에서 일한 지는 만으로 4년이 넘었고, 이번 심의회는 내가 이 기관에서 하는 열 두 번째 평가네.


이번 평가를 하면서 생각했어. 

아. 정말 그만하고 싶다.

그냥 하면 되는 일인데,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싫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전 직장에서의 일들은 이제 전생으로 느껴져서 내 기억이 흐려졌을 수도 있지만, 기록관리 범주에 들어가는 일이 이렇게까지 지난하고 지겨웠던 적은 없는 것 같아. 스스로 의아할 정도로. 왜 이 정도로까지 싫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결론은 이거야. 이 의미 없음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뭐가 그렇게까지? 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전체 과정을 포괄하는 공개용 답변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평가(appraisal)의 본질에서 멀어져 있는, 기관에서 기록물을 합법적으로 폐기했다고 할 수 있는 절차를 수행하는 일에 불과해서라고. 물론 그것도 의미가 전혀 없는건 아니겠지만. 아니, 어쩌면 정말로 없을지도?

우리가 아키비스트라운지를 만들고 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올려갈 때 ‘기록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각자 썼던 것 기억나? 너는 ‘이 직업과 공간에 속하면 왠지 모르게 정의롭고 좋은 일을 한다는 기분에 어깨를 으쓱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과 막연한 기대감으로’ 기록학을 선택했다고 했지. 나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어떤 기록이 1차 사료로 남아 역사가들을 만나게 될 지 결정하는 일 – 평가 – 에 매력을 느꼈어. 물론 21세기에 역사가 쓰이는 방식은 예전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기록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일이 좋았어. 기록이 만들어지는 그 자리에서 어떤 기록이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서 만들어지게 하고, 필요한 기간 동안 존재하도록 하고, 그 사이에 기관 내외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활용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 일을 진짜로 하고 있는데 왜 괴로울까? 하고 싶었던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의 배부른 생각일까?

아니야. 내 마음이 이렇게 힘든건, 공공기관 기록관에서 하는 ‘평가’라는 이름의 업무 – 폐기라고 더 많이 부르지만 – 는 평가가 아니기 때문이야. 가치 있는 기록을 선별해내는 일이 아니고, , 기관의 누군가가 (보존기간이 지나서) 폐기하고 싶어하는 문서를 합법적으로 폐기할 수 있게 해주는 일에 그치기 때문이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이런거야. 첫번째, 어차피 가치 평가를 해야 할 기록이 심의 목록에 있을 확률은 희박해. 기록연구사에게 관리 권한이 주어지는 기록은, 주로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관리되는 기록이거나, 또는 관리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기록이야. 기관의 역사는 길고 기록연구사를 채용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기관일 수록 그럴 확률이 높지. 그래서 결국 나는 정해진 절차를 밟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확인해야 할 게 참 많지만.

두번째, 그 와중에 애써서 검토를 해. 그걸 누가 알지? 나는 기록물평가심의회를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 번씩 해. 필요할 땐 한 번 더 하기도 하고. 회의는 서면으로 해. 자연스럽게 내 심사 결과를 반영한 기록물평가심의서가 그대로 의결까지 갈 확률이 높지. 그래서 난 엑셀 목록에만 내 의견과 사유를 쓰는게 아니라, 대면회의를 했다면 당연히 만들었을 심의회 안건을 대신하는 심사의견서를 별도로 작성해. 이번 심의 범위가 뭔지,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심의 목록을 전반적으로 검토했는지[1]​, 이번에 특별히 유의한 건 뭔지, 지난 평가심의회의 결과는 어떻게 적용했는지, 생산부서에서 폐기하겠다는데 보류한 건 그 이유가 뭔지, 부서에서 보존기간 상향의견을 냈는데 그대로 반영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같은 것들. 결국 내가 하는 일은 ‘가치 평가’라기보다 생산부서가 적어 둔 정보를 검수하는 일에 가깝지. 검토의 품질을 확인할 사람도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대충할 수는 없고.

어차피 평가심의의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은 이거야. 

그래서 서고 얼마나 비울 수 있어? 혹시 이것도 같이 버리면 안돼? [2]​


세번째, 이 내용을 태연하게 정리해서 기록물평가심의회에 올려야 할 때 마음이 무거워. 특히 심의에 응해주시는 외부위원 분들께 충분한 설명 없이 목록을 잔뜩 안겨드리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게 참 송구스러워. 뻔히 어떤 문제가 보일 지도 느껴지는데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어려운 난감함. 하지만 다음 심의회에도 이보다 크게 개선될 건 없을걸 알아서 느끼는 답답함. 하지만 이게 꼭 서면회의의 문제인가? 꼭 그런건 또 아니지.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기록 평가라는 일은 나라는 존재가 없어도 엄격하게 관리하는 관계부처와 공시 의무, 기관 내외부 감사 시스템과 평가(evaluation) 체계가 있으면 돌아갈 수도 있는 업무야. 물론 업무 배경 지식을 익히는데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과정과 성과의 품질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 그런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업무가 어디있어? 업무 과정과 성과의 품질은 누가 판단하겠어? 도리어 어떤 측면에서는 나보다 나을 수도 있겠지. 차라리 정말 그렇다면 기록관리가 그 기관의 핵심 부서에서 내부 직원이 챙겨야 하는 중요한 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겠지.

17년째 기록물평가심의회를 내부에서 운영하는 기록연구사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와중에 뭐라도 좀 더 의미 있는 – 기록연구사로서 내가 떠맡는 찜찜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 심의회를 만들 방법이 있나 찾다가, 결국 진짜 최선의 방법에 닿으려면 내가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이면 안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건 여기까지라는 결론을 내려. 내가 자의식 과잉인걸까? 기록’전문가’로서 인정 받지 못한다는 투정을 부리는건가? 아니야. 난 그저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기를 바라고, 내가 해낸 것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받고 싶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싶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야. 

외부위원으로 참여하는 공공기관 기록 평가는 어때? 영구기록물관리기관에도, 기록관에도 외부위원으로 참여한 경험이 많은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


[1] 이번 평가심의회 대상은 수량으로는 2,***권, 엑셀로는 5,***행이었고, 작년 하반기 심의서를 보니 엑셀 행 수가 1만 행에 가까웠네. 전체 목록에서 생산부서 의견조회가 어느 정도 수월할 문서를 우선 선별해서 목록을 확정하고, 분류번호-기능명칭이 잘못 연결된 경우, 기록물철명으로 볼 때 단위업무를 잘못 매핑한 경우, 단위업무는 맞게 썼는데 보존기간을 잘못 기입한 경우, 보존기간까지 맞게 썼는데 보존기간 만료시점을 잘못 쓴 경우ㅏ 만료시점을 수정하고 나니 아직 보존기간이 경과하지 않은 경우 등을 확인하지. 가끔 딱 봐도 생산연도와 종료연도(나는 법정 서식 중 ‘생산연도’를 ‘생산연도’와 ‘종료연도’로 나누어서 써) 사이에 – 업무 특성상 그러기가 어려운데 – 시간차가 별로 없으면 부서에 진짜 이 시기에 업무가 종료된 문서가 맞는지 확인을 요청하기도 해. 그 다음으로는 동일한 업무에서 생산된 문서들이 생산부서에 따라서 서로 다른 단위업무에 편성되어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지. 기록물철 이름은 거의 같은데 단위업무와 보존기간이 제각각인 경우들이 있거든. 그리고 이 모든건, 기록관리기준표상 보존기간이 관련법과 내규의 최소 보존기간을 반영하고 있다는걸 전제로 하지. 이제는 데이터가 쌓여서 AI를 활용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공공기관이라 접속도 막혀 있을 뿐더러 공공관의 기록물 목록을 올리는 건 내부 정보 유출이라 한 땀 한 땀 하고 있네.

[2] 진짜 억울해. 가치가 없는 것들은 가차 없이 버리는걸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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