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담당자의 선의와 책임감에 의존하는 구조: UX 없는 기록관리기준표

아키비스트라운지 인사이트 아웃 #1 평가심의를 평가합니다 – 5


진현에게

덕분에 여러 기관들의 업무 방식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어 좋았어. 유사 기관 기록연구사들끼리는 기록관리 또는 그 주변 업무와 관련해서 수시로 사례를 공유하지만, 생각해보니 평가와 관련해서는 ‘그 곳은 A라는 단위업무의 보존기간을 몇 년으로 하고 계신가요?’ 이상의 교류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잘 모르는 기관의 정보가 궁금할 때는 해당 기관이 고시한 기록관리기준표를 찾아보기도 하는데, 정보통신망에 고시하는게 의무이니 구글에 “기관명+기록관리기준표”로 검색하면 바로 나올 것 같지만 의외로 쉽지 않지. 공공기관의 경우 별도 고시보다는 사전정보공표 항목인 ‘단위업무 목록’ 형태로 올라가 있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업무 자체는 각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영역이고, 특히 고유업무라면 타기관의 보존기간이 크게 의미 없을 수도 있어. 그래서 굳이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걸 수도 있겠지. 다만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고민을 반복하고 있다면, 이 지점에서의 정보 공유는 생각보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기타공공기관에서만 일해왔기 때문에 BRM과 연계된 기록관리기준표를 직접 운영해본 경험은 없어. 다만 기록관리기준표를 사용하지 않는 기관이라 하더라도 업무 분류를 기반으로 보존기간을 책정한다는 점에서는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아. 눈에 보이는 차이는 대기능-중기능-소기능-단위과제 구조 위에 정책영역과 정책과제가 추가되느냐 정도이니 의미가 있지는 않지. 기록관리기준표든 다른 이름의 보유일정표이든, 결국 현장에서 마주하는 건 시행령이 제시한 관리항목—업무설명, 보존기간 및 책정 사유, 비치기록물 여부, 보존장소, 보존방법, 공개여부, 접근권한—이니까.

기록관리기준표는 다행히(?) 법정 서식은 없으니 중앙기록물관리기관의 기록관리기준표를 보고 가자

기록관리기준표에 대해서는 초점을 맞추는 지점이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고 학술적인 문제제기도 여러 학술 논문을 통해 이루어진 바 있지만, 나는 일단 기록 평가심의 과정에서 가장 괴로운 지점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업무 담당자들이 기록관리기준표를 기준으로 정보를 찾아내야 하는 그 순간 걸리는 것들에 대해서. 크게는 기록관리기준표의 관리 항목 자체에 대한 이야기, 관리 항목의 적절성 이전에 업무 담당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구조의 문제 두 가지로 나눠서 말할게(이 글에서는 기록관리기준표를 공공기관의 보유일정표라는 의미로 통칭할게).

제일 먼저 말하고 싶은건 바로, 관리 항목에는 없는 ‘종료 기준’. 트리거라고도 하지. 내가 볼 땐 현재의 관리항목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기록관리기준표의 신뢰와 권위를 떨어뜨려. 일반적인 행정 업무에서 나오는 기록은 연도별로 편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업무에 따라 관련 법에서 그 이외의 보존기간을 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예를 들어, <국세기본법>에서는 장부와 증거 서류를 ‘그 거래사실이 속하는 과세기간에 대한 해당 국세의 법정신고기한이 지난 날부터 5년간‘ 보존하라고 해. <자금세탁방지 및 공중협박자금조달금지에 관한 업무규정>에서는 관련 자료를 ‘금융거래관계가 종료된 때’로부터 5년간 보존하라고 하지. 하지만 기록관리기준표에 이런 내용을 담을 곳은 없어. 임의로 추가해서 관리할 수는 있겠지만, 영구기록물관리기관과 협의를 하는 과정이 원활하지는 않을 수도 있을걸.

업무 담당 부서가 알아서 해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 그런데 알겠지만, 특정 시점의 업무 담당자가 그 업무의 전문가일거라고 확신할 수 없는게 공공부문이잖아. 특히 순환 근무 제도 덕분에 말이야. 단위업무 보존기간을 재검토할 일이 있더라도 업무 담당자는 전임자가 잘 확인했을거라 믿을거고, 기록연구사는 최대한 노력해서 확인하겠지만 그 기관과 관련된 모든 법을 확인하기 어려울거야. 마침 기록관리기준표 서식에 있지도 않으니 고려 대상도 되지 않은 채로 넘어가겠지. 그렇게 되면, 이렇게 문서가 생산/접수된 시점과 다른 어떤 시기를 보존 시작 시점으로 삼아야 하는 기록물의 경우 기록관리기준표상 보존기간만큼 보존하고 합법적으로 폐기하였으나 정작 업무 관련 법률을 준수하지는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기록 생산자인 직원들은 기록관리기준표라는 기준에 권위를 부여해줄 수 있을까? 안그래도 이미 보류의 진짜 원인 중 하나가 판단을 미루는 것에 있는 것 같은데 더 심해지지는 않을까?

보존기간 분류도 마찬가지야. 현재의 1> 3> 5> 10> 30> 준영구> 영구로 올라가는 체계는 (적어도 기록연구사들에게는) 익숙하고 편리하지만, 실제 법령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기간을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예를 들어 6년(주1)(주2)과 같은 기간이 요구되는 경우에도 ‘6년’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으니 보존기간을 10년으로 책정해야 할 수밖에 없어(여기에 대해서는 법령개정안이 나온 걸 본 것 같기도 해). 기록관리에서는 가치가 있는 기록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이상 보존할 필요가 없는 기록을 폐기해서 기록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데, 4년이나 더 보관을 해야하는거지. 연간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는 기록이라면 상관 없지만, 한 달에도 몇 상자 분의 동종 대량 문서가 나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다시, 기록관리기준표는 처리과의 업무를 돕지 못하지.

그렇다면 이런걸 해결하면 기록관리기준표로 기록을 ‘관리’할 수 있을까? 이 표를 기준으로 기록 평가심의를 해도 될까? 글쎄. 아닐걸. 왜냐하면 기록관리기준표는 ‘기록’을 관리하는 기준표가 아니니까. A라는 업무에서 나오는 기록은 몇 년 보존한다고 규정할 뿐, 그 업무에서 어떤 기록이 생산되어야 하는지까지는 정하지 않고 못하니까. 기록관리기준표가 업무분류에 보존기간을 추가하는 형태를 유지하는 이상, MECE를 완벽하게 지켜 완벽하게 분류한 ‘업무’분류를 기반으로 한들, 실제로 분류를 해야하는 순간에 필요한 기준을 정확하게 제공하지 못한다면 기준이 아니라 참고 자료에 머물 수밖에 없지. 지금과 같은 기록관리 체계 하에서, 특히나 기록이 아닌 업무를 기준으로 하는 표만 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등록하지 않으면 관리할 필요도 없고, 등록하더라도 관리 정보를 잘못 기재해둔 들 알아볼 사람도 없는데, 업무 담당자들이 책임감과 업무 지식을 바탕으로 기록을 잘 관리하길 기대하는게 맞을까?

결국 업무 담당자는 자기가 지금 만들 문서 또는 정리할 문서의 ‘단위 업무’가 뭔지,

어떤 기록물철을 선택해야 하는지,

보존기간이 몇 년인지 알아야 하는 순간마다 멈칫 하게 되지.

기록관리기준표는 이 질문에 즉각적으로 답을 해주지 못해. 결국 업무 담당자는 전례를 따르거나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순간 업무 담당자는 기록관리기준표라는 기준과 구체적인 문서 사이에서 해석을 해야 하고, 이 판단이 잘 이루어지기 위한 작동 조건은 업무담당자의 선의와 책임감이 돼. 그런데 제도는 선의로 작동되지 않고, 그런걸 기대해서도 안돼. 사용자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움직여야 해. 그렇게 운영되지 않는 업무의 품질은 개인의 숙련도와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UX의 개척자로 불리는 도널드 노먼은 ‘기술 디자인은 사람이 바람직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따라 만들어야 한다’며, 책임을 묻고 교육시키는 철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했어. 사람이 아니라 미흡한 디자인, 절차, 작업 관행이 진짜 원인이라는 거야(주3)

그 말을 읽는 순간 기록관리 과정에서 기록관리기준표가 활용되는 장면들이 단계별로 스쳐 지나갔어. 기록관리기준표는 현재 공공기록 평가 제도 안에서는 기록관리기준표로 대표되는 사전 평가 단계에서도, 보존기간이 경과된 문서를 대상으로 하는 평가 단계에서도 적용되는 핵심 기준이야. 그 기준을 적용하는 과정이 사람의 판단과 책임감 위에 있으면 안돼. 이렇게 설계해 놓고 ‘왜 제대로 하지 않냐’고 말하면 안돼. 책임을 묻고 교육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주1)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국제 납세의무 준수 촉진을 위한 협정에 따른 금융정보자동교환 이행규정>을 보면 ‘보고 금융기관은 실사를 위해 수취한 본인확인서와 증빙자료를 해당 정보수집기준연도의 12월 31일부터 최소 6년 동안 보존하여야 한다(제57조)’고 하지. 이런 최소 보존기간이 이거 하나 뿐일까?

(주2) 자꾸 업무 유관 법령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게 단위업무의 보존기간을 책정하는 근거 중 사실상 유일하게 구체적이며 반드시 반영해야 하는 기준이기 때문이야.

(주3) Norman, Donald. 김주희 역 (2022). 도널드 노먼의 인터랙션 디자인 특강: 인간과 프 로덕트의 상호작용 디자인. 서울: 유엑스리뷰 (원전 발행년 2007)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