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 한국수출입은행 최윤진

아키비스트가 말하는 아키비스트 인터뷰시리즈-21


어딘가에서 아키비스트로 일하고 있는 여러분, 모두들 안녕하신가요?

가끔 유난히 힘든 날이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그 분야로 취직도 했지만, 그리고 내 일에서 기쁨을 찾는 순간도 있지만, 때때로 회의에 빠지게 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럴 때 하소연하며 기대고 싶은 선배의 존재가 간절해 집니다. 그래서 만나 본 스물 한 번째 주인공은 한국수출입은행 아키비스트 최윤진 부부장입니다. 담담하게 답하는 목소리와 표정에서 긴 시간을 건너 온 단단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학부 첫 전공은 경영학이었던, 사진과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이 기록학을 공부하고 일해온 긴 여정을 함께 들어볼까요?

  • 일시 : 2023. 9. 5. (화) 17:00-18:30
  • 장소 :  카페 ‘소저너’ (서울)
  • 인터뷰 : 류신애
  • 정리 : 류신애, 황진현

최윤진이다. 한국수출입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큰 변화는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일하면서 논문을 쓰느라 신경쓰지 못했던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논문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기도 하고. 그간 못 만난 사람들을 만나고,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읽고, 못했던 일들을 하는 중이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부터 총 20권 분량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을 시작했고, 극장은 두 번 갔다.

졸업을 한 대학 안에 노동아카이브가 있어서 아카이브를 통해 기록학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당시 아카이브 활동의 중심에는 노동과 사회문제, 그 역사를 기록으로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는 정치·사회 분야 연구자들과 아키비스트들이 함께 있었다. 그 작업의 큰 줄기는 한국현대사에서 누락된 기록을 수집하고, 이 과정을 통해  좀더 체계적이고 규모 있는 아카이브를 설립하고자 하는 활동이었다. 학부생 때 거기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는데, 맡은 일은 우리나라 진보 정당의 주춧돌이 된 시기에 대한 역사를 기록으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 때,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기록이든 사람들의 삶과 조직의 모습을 보는 것이든 어떤 측면에서 기록을 통해 의인화해 보는 경험으로 이해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기록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당시 일하던 선배들이 여럿 있었는데 아키비스트라는 이름으로 인지하진 못했지만 이분들을 통해 기록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공부한 기록학은 개인적인 상황과 연결된 직업적 선택임을 부인할 수 없다. 원래 관심사는 사진과 영화 분야였다. 처음에는 예술로서. 하지만 결국 예술 자체보다는 어떤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주제와 문제의식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고 당시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과정과 맞물려 진로를 탐색하던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도달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에 입학했던 학부 전공은 경영학이었는데 재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할 걸 그랬다 (웃음). 그게 진짜 실용적 선택이었을텐데.

내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 한국의 입시 제도는 지금보다도 더 제한된 선택을 하게 되어있었다 보니 경영학과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재미도 없고 부모님도 하고 싶지 않은걸 억지로 강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다만 관심을 갖는 영역을 제도교육 안에 제한을 둔 것이 가장 후회스러운 부분이다. 영화와 사진이라는 분야는 기본적으로 예술의 영역이고, 재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다보니 예술적 열정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을 제도교육에서 배운다는 것 자체가 진취성이 떨어지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기록학을 선택한 것은 조금 달랐다. 사진이든 영화든, 요즘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사회파’의 영화를 좋아했고, 어떤 장르의 영화일지라도 은유되어 있는 사회문제와 주제의식, 사람들의 이야기에 훨씬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사한 고민을 공유하는 이들과의 만남에 큰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있었다. 내 딴에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어렵지 않았고, 자연스러운 경로였던 것이다.

맞다.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도 기록을 연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자격이라는 게 있는지도 입학 후에 알았다. 수업을 통한 정보가 아니라 노동아카이브 활동 속에서 먼저 접했던 것이다보니 실용적 선택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순진했다.

대학원 입학 전에 이미 노동아카이브에 취업해서 1년 정도 일을 했고, 진학하면서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제작 중이던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박물관과 미술관,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예직들이 자신들의 연구분야에서 기록을 발견하고 그걸 기반으로 연구하는데, 기록학 기반 이론과 철학은 이 기록, 기록내용 등과 연결되어 있어 그걸 연구하고 싶었다.

달랐다. 2005년 8월에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입학동기가 9명이다. 그 때는 많은 인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적은 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대학원 수업이 어떤지 잘은 모르지만 당시 여러 다양한 토론이 가능했던 것 같다. 수업 안에서 심오한 논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나누었던 것 같다. 물론 대학원이라는 공간의 특성도 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이소연 선생님 수업에서 ‘포착’과 ‘획득’이라는 용어의 정의와 해석에 대한 토론에 대해 들은 게 기억난다. 선진 사례라고 이름 붙은 국외 사례와 시스템 설계, 관리표준, 기록관 경영이 어떤 방향으로 연구되고 있는지를 배우고, 그것에 내재된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 재밌었다. 물론 그 조차도 꽤나 공공기록의 영역에 치우쳐져 있었을 지 모르지만.

이와는 다르게 기억하는 장면도 있다. 2005년은 법이 제정된 지는 6-7년이 지났고 기록연구사가 본격적으로 배치된 첫 해였다. 흔히 말하는 0세대 선배들 말이다. 첫 수업에서 누군가가 ‘나는 6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해서 ‘아 이 전공은 공무원이 되어서 해야 하는 업무 분야가 주류인가보다’ 하고 알았다. 동기와 선배들 중에는 일찌감치 행정법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좋은 기억과 아쉬운 기억이 같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꼭 자의적 선택만은 아니다. 주변을 보니 기록학 전공자가 직업적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아서 고민이 되었는데 그 시기에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한국문헌정보기술에 프로젝트연구원으로 참여했고, 프로젝트를 끝내고 정식 입사했다.

파주시 역사자료 보존시스템 구축사업이었다. 파주시라는 지역이 새로운 도시로 설계되고 확장되면서 기존의 도시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기록으로 보존하는 측면에서 시작된 컨설팅 사업이었는데 다양한 사례들을 조사하고, 지역의 역사에 맞게 기록을 수집, 시스템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였다. 사업의 결과로 파주시가 가지고 있는 기록을 디지털화하고, 시범적으로 시스템을 통해 보여주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그 사업 후에 파주시에서 기록관리 전담 직원을 채용한 것으로 안다. 그 또한 프로젝트의 큰 그림에 포함된 결과 중 하나였지 않을까 한다. 그 프로젝트가 끝난 후 정규직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3년 정도를 컨설턴트로 일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무엇보다 공공기관의 1인 기록관 체제와 달리 고민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한국문헌정보기술은 직업적으로 본격적으로 기록을 다루는 일을 하는 출발로써 소중한 직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지금도 의미 있는 역할을 많이 하는 기업이고, 지금도 업무에 대해서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첫 직장이다보니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출발선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 번째로, 컨설턴트로서 내가 잘 지은 집에 살아보지 못하고 나오는 느낌은 늘 아쉬운 측면이 있었다. 그럴 때 한국사진사연구소(현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이하 ‘연구소’)에서 일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직장 동료를 통해서 받았다.

20대 내내 영화와 사진을 찍어왔고, 두 가지는 지금도 나를 소개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언어 중에 하나이다. 영상 역시 사진의 모음이라고 생각하는 측면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기억의 방식도 사진을 찍듯, 이미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이런 관심과 고민을 알고 있던 당시 동료가 제안을 한 것이다. 당시 연구소에 있던 김장환 연구관이 연구소가 앞으로 확장해 나갈 방향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같이 의기투합해서 연구소를 성장시켜보자고 제안해서 고민 끝에 결정했다.

그런데 김장환 연구관은 이미 국회 기록연구사 시험을 본 상태였고, 합격해서 사진사연구소를 나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같이 일을 한 날은 하루도 없다. (웃음) 그 날이 생각난다. 눈이 많이 왔던, 내 생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환에게 전화를 받았다. 자기가 국회로 가게 되었다고. 결과적으로 나는 연구소 구성원 중 유일한 아키비스트로 일하게 되었다. 만약 같이 일했다면 어땠을까? 내 진로는 달라졌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안양시와 대림미술관이 함께 한 APAP(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가 있었고, 문화예술 아카이브 전문가 양성과정 교재를 만들기도 했다. 미술관이 주도하긴 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기업의 근거가 있었던 지역의 재개발에 맞물려 지역 구성주체들이 직접 기록화에 참여하는 일들이었다. 안양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진기록화 수업을 하기도 했고. 한국프로사진작가협의회에 있는 분들이 같이 하는 프로젝트도 있었는데, 이 협의회에는 지역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작가들-즉, 기술적으로 도시 기록을 할 수 있는 분들-이 소속되어 있어서 그 분들을 대상으로 어떤 것을 어떻게 기록할지,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고 기술할지 등을 교육했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기록의 매체를 한정하고, 사진이라는 언어에 기반한 기록에 대한 고민을 좀더 깊이 있게 해본 계기는 되었던 것 같다. 기록관리라고 하면 모든 기록의 유형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제안해야 하는데 그 점이 조금 달랐으니.

그런데 아무래도 연구소가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다보니 해당 시기에 디지털아카이빙연구소와 조인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오게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주한 박정희 시대 경제 관료 구술채록 사업을 하던 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게 일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으로 공공기관이라는 조직 안에서 살아보니 낯설고, 무거웠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공공기관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다. 공공기관의 기록관리 업무와 그 프로세스는 컨설팅 등으로 알고 있지만, 조직의 프로세스를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처음으로 공공기관이라는 조직 안에서 살아보니 낯설고, 무거웠다. 특히 유일한 아키비스트라는 이름 자체가 ‘혼자’임을 의미했고, 그건 ‘독립’과는 동일시되지는 않으니까.

처음에는 나에게 요구하는 바가 진정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일을 수동적으로 하길 바라면서도 전문성을 발휘하기를 요구하는 모순된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첫 아키비스트여서 뭘 하든 그 기관의 ‘첫 OO’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일을 한다는 건 사람들을 설득하고, 결국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산을 받아서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없지 않았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 일도 할 수 있고, 이번에 이렇게 하면 다음에는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독립성을 발현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오늘 한국은행 아카이브 방문 전, 구글에 ‘한국은행, 아카이브’를 검색해 보았는데,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자료를 보니 신기했다. 당시에는 맨바닥에 깃발 꽂는 심정으로 일한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보람이 있긴 한건가 싶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 햇수로 5년의 기간 동안 그 안에서 ‘아카이브’라는 단어를 누가 듣든 말든 계속 쓰다가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대로 처음 듣는 말은 아닌 걸로 만들긴 한건가 싶기도 하다. 

전 직장에 간다는 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기도 한데, 한편 ‘당시 계획했던 것들이 지금은, 드디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어 있을까’ 라는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내가 내 기억보다 많은 일을 했더라 (웃음). 현재의 담당자가 정말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결과물에 대해 내가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른 것보다 계획 단계에서 아카이브 공간 확보와 관련해서는 도면을 보면서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별관 리모델링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그 장소를 둘러싸고 여러 부서가 신경전을 벌였는데, 다른 조직은 이미 해왔던 일들에 기초하다 보니 ‘우리가 이런걸 어떻게 해왔고 이 공간이 추가로 주어지면 뭘 할 것이다’라고 말할 게 있었는데, 기록관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기획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나도 내가 있던 팀도 모두 고생해서 결과적으로 기록관 서고 외에도 전시와 이용자를 위한 아카이브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개관한 아카이브를 보니 나도 여기에 기여했구나, 그렇게 애쓴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공공기관에 있는 기록연구사들이 대부분 비슷할거다. 많은 경우 공공기관에 대한 외부인들의 기대와도 겹쳐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유의 기능과 중요성이 강조되다 보니 ‘와 한국은행..’ 하면서중요한 기관이라고 감탄하는데,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특정 분야에서는 고유의 가치를 갖는다. 대한적십자사는 1905년부터 있지 않았나? 문제는 공공기관들이 역사에 비례해서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 주변을 돌아보면 기관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이 역사를 그 자체가 아닌 이야기와 홍보 재료, 더나아가 엔터테인먼트로서 소비한다. 하지만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관점으로 봐야할 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홍보관을 만들면 기관의 연혁을 스토리월로 만들고 관련 기록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정작 기록 안에 있는 역사를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기록연구사에게 기록을 연구하는 기능을 부여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체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주요부서’의 뒷받침 정도로 여기는 기록관의 위상에서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런 점들이 당연히 처우와 연결되다보니 많이 힘들었다.

한국은행에서 RM(Records Management)과 AM(Archives Management)을 모두 했다. 해보려고 했다. 한국은행 같은 경우 직원 수가 2,400명 가량이고, 60주년을 막 지난 시점이었는데 기록 자체를 기관 역사와 활동의 결과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 당시 총재가 경제연구원을 통해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아카이브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려고 하기도 했고, TF를 조직해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RM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을 추진하기에 조직은 무겁고, 일은 많고, 나는 직장이 나에게 원하는걸 해야하니 힘들었는데, 그 때 한국수출입은행에서 공고가 났다. 주변 동료가 알려줘 알고 있었다. 원래는 다른 후배가 이직을 준비하는 걸 도와주었는데, 응시하지 않아 내가 이직을 해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미 수출입은행에 담당직원이 있었기 때문에 추가 충원되는 줄 알고 동료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지원했는데 그 분은 휴직 중이었고, 이후 퇴직하셨다.

업무 영역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기관이 이름만 보면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기관이다. 한국은행은 경제 주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면서도 정책적 측면에 훨씬 무게를 두기 때문에 피부에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출입은행에 입행하면서는 ‘금리’보다는 ‘수출입’이 더 활력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록관리 실무에서도 수출입은행 직원 수는 1,200명(주: 알리오 기준 2023년 2/4분기 직원 수는 1,212.54명)으로 한국은행의 절반 정도여서 기관이 조금 더 젊고 덜 무거울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들어가 보니 실제로는 기관이 상대적으로 작아도 업무가 역동적이고 기록이 더 많아 놀랐다.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맞다. 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 해야 했다.

사실 ‘지쳤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온 데에는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일해온 경험과 보내온 시간이 쌓인 결과인 것 같다. 다른 아키비스트들도 그럴텐데, 기관에서 얼마나 귀기울여주고 지원해주느냐에 따라 일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은가? 이제 조직 안에서 적어도 낯선 영역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을 추진할 역량이 축적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3-4년은 많이 힘들었다. 조직에 적응도 해야하고, 전임자가 해왔던 일을 이어해야 하는 것도 불가피한 상황이지 않은가. 조직마다 다른 추진 방식도 익히고 알아가야 했고. 협조적이지 않은 관리자와 이견도 극복해야 하고. 그 일을 지속해온 힘 의 원천은 외로움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일, 노동은 함께 할 때 더 큰 효능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공공영역의 기록관리는 그렇게 하기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니까.

한국은행에서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을 한거니까 눈에 조금 띄었을 수 있겠다. RM을 통해서 뿐 아니라 기록을 통해 조직에 영향을 미칠 다른 가치 있는 일을 만들고자 했던 것도 인정을 받은 것 같다. 퇴직 또는 퇴직 예정 직원들을 통해 사료 해제를 기획하기도 하고. 그랬더니 총재 표창을 두 번 받았다. 받을 때는 몰랐는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더라. 30년을 근속해도 받지 못하는 직원들이 많으니까. 처음 하는 일이고, 인력 충원이나 승진 같은 다른 방식의 지원을 해 주기는 어려우니 격려차원에서 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기록을 다루는 일을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로부터 출발한 일이었기 때문에 반문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 같다. 이런 걸 하자고 아이디어를 꺼내고 추진한 ‘시작’에 대한 포상이었을 것 같다.

받을 땐 그 자체가 아주 잠깐의 시간인 것 같고 큰 의미가 있나 싶지만 아주 조금은 달라진다. 그런데 달라지도록 하는 것도 역시 실무자의 몫인 것 같다. 모든 부처들이 포상을 기획하기 때문에 업무 분야별로 다양한 상이 있다. 대통령상도 있는데 장관상을 받았다고 부서 이름을 뽐내기도 조금 애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많이 도와주어서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감사하며 업무관심에 활용해야 한다. 실제로 기록관리는 전직원의 협조가 중요한 일인 것이 사실이고.

관리자격인 팀장, 나, 다른 실무자 셋이서 함께 시상식 자리에 갔다. 공공기관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상급자가 수상하러 나가기로 했는데, 행사장의 자리 배치상 그러면 수상자가 아닌 다른 사람은 ‘동반자석’이라는 구역에 따로 앉아야 했다. 업무 특성상 포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사람일 실무자가 시상식 자리에서는 단지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기획한 상인 만큼 기록연구사 또는 전담실무자의 기여도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조금은 세심하게 준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관례에 따르는 포상 방식 때문에 국가기록원 직원들은 기록물관리 전문요원들이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 뿐 아니라 꽤나 많은 전문요원들이 한마디로 의기소침하고 뻘쭘했을 것 같다.

최윤진 부부장이 보내 준 ‘나를 버티고 나아가게 하는 것들 : 글과 사진’ – 과 그 설명
(왼쪽) 2021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라이프 展>에서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사진가 루이스 하인의 사진에 달린 글귀다.
그의 사진은 미국 아동 노동법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른쪽) 2018년 작고한 번역가, 시인, 교수인 황현산의 에세이다.
“나는 정치·사회 현실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문인을 경멸한다”고 말했던 그였다. 그렇다. 그람시의 말대로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이며 비겁할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다이어리를 펴서 전날 써 놓은 메모를 확인한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 까지. 구매, 기획, 비치 등등을 포함해서. 컴퓨터에 쓰면 그 자체를 잊게 되고 놓치기 쉽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조간스크랩을 스크린하고, 수신 못한 업무메일과 결재 등을 처리한다.

안전운영부에 구매·기록물 관리팀이 있고, 팀 안에 구매와 기록물관리 두 라인이 있다. 기록관리 담당으로는 나까지 세 명이 있는데, 다른 두 분은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은 아니고 기록관리 실무를 함께 하는 분들이다. 세 사람이 단위업무를 나누지는 못하고, 내가 계획한 업무들을 같이 수행하는 구조이다. 원래는 나까지 두 명이었는데 작년 7월에 전담인력으로 한 명이 늘었다. 전문요원 충원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도 나름으로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이상적 구성은 아니다. 나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이든, IT분야의 영역이든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기록관리 업무분야의 기획을 나누어서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예를 들면 IT에 감각이 있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또는 데이터를 잘 다루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데이터가 기록으로서 체계적으로 관리되도록 계획하고 추진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록’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 일에 대해 같이 의논할 사람이 간절하다. 주변에서 충원이 모두 좋은 건 아니라는 말들을 하기도 하지만. 루틴에 따라 일을 하는 패턴일 수록  혼자 하기보다 자극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혼자 일을 그저 해 나가는 상황을 넘어서고 싶다.

조직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현재는 한국은행처럼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든지 전시를 한다든지 하는 일보다는 기록의 품질을 높이고 그 기록을 잘 관리해 조직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필요한 기록이 있을 때 바로, 쉽게 찾을 수 있고, 기록관으로 모아 안전하게 보존하고, 조직의 개편과 이동 과정에서 지체없이 기록도 원할하게 활용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모습을 이루어내는 일 등등이다.

가장 기본적인 일인데 쉽지 않다. 직원들이 잘 들어주지 않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하지만 기록관리시스템이나 DB구축 같은 일들이 다 기관 전체의 업무 흐름과 관계된 것이 사실이라 아카이브의 활용보다 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달라졌다. 그런데 내 직급의 변화만큼 기록관리 환경이 달라진 요인이 있다면 기록관리업무가 이루어져 온 시간, 기록관리가 체계화되어 온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호칭이나 직급이 달라져 협력 여부가 달라지는 사람들이야 늘 있지만 그건 인성과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저 시간의 축적의 결과라고 여기고 싶다.

기관 안의 다른 직원들과 소위 별정업무를 하는 나같은 직렬 사이의 간극이 느껴질 때. 그 차이가 다양한 방식의 차별로 연결될 때가 아닐까.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특성상 이 곳은 직원의 다수를 이루는 공채 기수가 중요한 기관이고, 나는 그들과는 다른 별정직이다. 은행 정책상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조직개편마다 계속 바뀌고, 나는 매번 기록관리업무를 새롭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내 상황이 별로라는 점, 내가 소수의 상황에 처해 어렵다는 점을 반복 지속해서 얘기해야 한다는 건 사실 편치 않다. 아무리 인품이 뛰어나고 노련한 관리자라 하더라도 긴 시간 스스로를 보편적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이런 상황을 알기 어렵고, 그들에게 힘들고, 어렵고, 부족하다고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것이 싫고 어렵다.

기록관리는 일정정도 루틴과 사이클이 반복되고 축적되는 것을 통해 업무의 문화와 역량이 정착이 될 뿐만 아니라, 안에서 또 새로움을 찾아야 하는 일인데, 이동없이 기록관을 지키고 다른 직원들은 조직 개편에 따라 순환되는 구조이다보니 기록관리가 곧 나로 동일시되고 부서장들도 기록관리 업무에 있어서는 나에게 의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게 장점이기보다는 약점이 되고 만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과잉된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걸 내려놓고, 시니컬해 지지 않도록, 의미 있는 논쟁을 했으면 좋겠다.

처음 박사 공부를 시작했던 건 한국은행에 있을 때였다. 승진이 되지 않는 자리였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라도 발전하고 싶었다. 그저 붙박이처럼 머물러 있고 지체되는 것은 일상을 고통스럽고 지루하게 만들지 않나? 유사 관심을 공유하는 이들과 세미나나 스터디를 하기도 했는데 이런 저런 노력을 하다 보니 이럴 바엔 좀더 강제된 체계 안에서 공부를 하자 싶었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학교에 가니 돈을 받으며 일하다가 돈을 내고 학교를 다니는 그 시간 자체가 좋았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좋았고. 물론 공부하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그리고 논문을 써야 할 시기에 이직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상대적으로 필드에 가까이 있는 주제를 선택해 보자고 계획했는데, 결코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 기록학을 선택했던 시기로 돌아가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고 범위를 조정하면서 학위논문에 이르게 되었다. 사건 안에서 편린으로 남아 있는 기록들에 대한 것이었다. 기록을 반드시 만들겠다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활동 속에서 남은 기록들, 그들의 기록 욕구에 대해 생각했고, 소수자의 기록과 기록 욕구로 주제가 수렴되었다. 정말 주제를 좁혀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치열했던  사건의 상황만큼 기록이 많이 생산된 쌍용차 사건을 관찰하면서 사건에서 기록이 서로 충돌했다는 점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몇 가지 떠오르는 주제가 있는데, 관통하는 것은 그간의 실무에서 비롯된 고민을 글로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다. 너무 바쁘고 힘들고 인생이 타의에 의해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이 때,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해 왔던 ‘일 ‘을 학술적으로 정리해 보면 어떨까 싶다. 지금의 시간이 어떤 의미로 채워졌는지를 생각해 보는 차원에서.

다음으로는 공공기관의 기록의 역사성에 대한 것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기관의 기록관리와 기관에 대해 쓰고 싶다.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직업적 선택은 다른 문제이다 보니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직업으로서 여러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서 결정한 결과였고, 다만 앞으로의 시간을 통해 결국 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록 커뮤니티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그 안에서도 편차가 크다. 이제 막 업계에 진입한 사람, 어느 정도 커리어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 기록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관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등. 고용 형태와 연봉처럼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도 많이 다르다. 그러니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를 평평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입체적이지 않은가? 각자 겪고 있은 문제들이 서로에게 의지가 될 수 있으려면 상대를 보면서 열패감을 느끼기 보다 함께 지혜를 찾을 수 있는 관계에 있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대체로는 소수직렬로 일하느라 외롭고 힘든데, 같은 직군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내가 못나서,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직업적 윤리와 책무를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지만 조직 안에서는 생활인이다. 그저 그 특별함만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을 추진하고 잘 해내기 위한 역량보다 더 과잉된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때로 하루하루 잘 해나가는 것 그 자체가 귀하다는 걸 잊고 말이다. 과잉된 책임 대신 더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고민을 나누면서 시니컬하지 않게,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풍부해 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여기서만큼은 서로에게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림34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