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비스트라운지 인사이트 아웃 #1 평가심의를 평가합니다 – 8
신애에게
시간이라는 게 정말 이상한 것 같아요. 어제 일 같으면서도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있잖아요.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나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강렬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던 계엄도 그렇고요.
처분동결이 여러 연구에서 제안된 이후 법률 조항으로 폐기금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 제도가 실효성 있게 운영되기를 모두가 바랐는데요. 그런데 정작 필요할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많이 실망스러웠어요. 언니는 세월호 참사 관련 기록 이야기를 했지만, 그 이후 법률 조항이 명확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발생한 계엄 상황에서도 폐기금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언니의 질문을 보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이게 다야? 정말 그게 다일까? 우리가 ‘기록’이라고 정의하는 대상만을 폐기금지의 범위로 삼는다면,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안일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기록으로 획득된 대상들은 평가심의 대상으로 올라오고 결국 그 평가심의 시점에 폐기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를 한다면 그것이 폐기금지와 무엇이 다를까? 싶은거죠. 폐기금지라는 선언이 오히려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자, 이거 중요한 기록이니까 폐기하지 마, 일정 기간동안 폐기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하지 마! 라고 하는 그 의미가 정말 애초 ‘동결’의 느낌으로 살아나려면, 기록으로 획득되지 않았거나 평상시라면 기록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을 유형들까지 동결 대상에 포함해야 의미가 있을거에요. 처분동결의 의미를 처음 배울 때는 잘 체감되지 않았는데, 12.3을 겪으면서 비화폰 서버, 통신기록, 그 외 무엇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다양한 데이터와 정보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절실하게 와닿았어요.
사실 이런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관련한 폐기금지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기록이 과연 제대로 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는 자꾸 드는 것 같아요. 언니도 말했듯, 나도 중요한 기록이 남지 않는 건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기록을 훼손하거나 무단 폐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오랫동안 기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다 보니, 그런 일은 사실상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업무담당자와 기록전문가 개인의 성실성에 기대어 의미 있는 기록이 남게 된다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생산현황통보도, 폐기금지도 그 운영에 대해 자꾸 회의감이 느껴져요.
생산현황통보가 사실, 무척 그런데요. 오랫 동안 생산현황통보가 왜 필요한가를 질문하면,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록이 생산되고 있는지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인지를 바탕으로 ‘영구기록물관리기관의 수집(이관)’에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인지와 수집에 대한 판단은 정말 이루어지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그 판단이 가능하다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폐기금지 운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지금 문서형 기록은 수량만 통보받고 있지만 그 외의 유형들은 목록을 함께 생산현황통보하도록 되어 있기도 하고요. 결국 우리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음에도, 그 데이터는 활용하지 못/안하고 폐기금지를 위한 목록을 기관에 다시 요청하고 있어요. 이미 만들어진 기록들에 대해 무언가를 파악하는 행위가 지금처럼 이어져서는 안되겠죠.
결국 평상시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기게 하는 방법과 제도는, 사전에 의미 있는 기록이 무엇인지를 얼마나 파악하고 이를 생산하도록 할 것이냐의 문제, 즉 ‘사전평가’에 있다고 봐야 해요. 기관의 주제적 기반, 조직적 특성, 업무적 특성, 그리고 그 안에서 생산되는 기록의 유형과 가치 등을 고려한, 기록 중심의 사전평가가 제도적으로 운영되어야겠죠. 현행 법률이나 제도에서 ‘사전평가’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록관리기준표의 작성과 운영이 사전평가의 하나라고 볼 수는 있어요. 다만 기록관리기준표는 업무기능이 중심이고, 그 기능에 따라 보존기간을 매긴 것이기 때문에 기록에 대한 사전평가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결국 저는 우리에겐 사전평가도, 기록에 대한 평가도 없다고 생각해요.
이제 평가는 이미 만들어진 기록을 대상으로 하는 사후적 관점만이 아니라 사전적 관점으로도 이루어져야 하고, ‘사전평가’라는 개념 안에는 기록의 내용적 가치평가뿐만 아니라 유형적 특성에 따른 평가 방안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시청각처럼 이미 다수 생산되고 익숙한 유형뿐만 아니라 데이터세트를 비롯해 앞으로 무엇이 더 등장할지 모를 디지털 기록들은 품질과 이용가능성을 고려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테니까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평가가 얼마나 촘촘하고 구체적으로, 다양한 기준점들을 마련해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평가의 시점과 방식이 얼마나 다각화되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봐야겠어요. 평가야말로 우리를 진정한 전문가라 부를 수 있는 영역이라 한다면요.
무엇보다 모든 것이 자동화, 지능화 되고 있는 세상에서 기록전문가가 기관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요즘 나를 지배하거든요. 난 실무자는 아니지만, 기록관리 실무와 관련된 일들을 하기 때문에 이 일이 모두 AI에 대체될 것만 같아요! 기술(descirption)도 분류도, 보존과 서비스도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방법론은 AI가 대체할 수 있다 해도, 그 기준을 만들어내고 법적인 기록전문가로 인정받는 정말 중요한 일이 평가잖아요. 이것 만큼은, 우리가 더 깊이 고민하고, 신경쓰고, 시간을 써야할거에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느냐의 현실성을 말하는 것보다, 이 평가의 체계를 어떻게 재설계해야 할까를 말하는게 중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