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평가(appraisal)’라는 말이 민망하지 않게

아키비스트라운지 인사이트 아웃 #1 평가심의를 평가합니다 – 9


진현에게

첫 번째 편지에서 내가 평가 업무에 AI를 이용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상용 AI를 쓸 수 없는 공공기관이라 아쉽다고도 했고. 마침 지난주에 AX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이림 Do Better Things 대표가 기록학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를 읽었어. AI를 쓰는 인간의 역할을 묻는 질문이었는데, 답변 중에 이런 말이 있었어. 기록학이라는 학문의 베이스는 깊겠지만, 그만큼 AI가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할 것 같다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 일을 AI에게 맡기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됐다는 거야.

지금 내가 기록연구사로서 하고 있는 실무 중 상당 부분이 정말 그래. 제도적인 방향을 고민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그걸 붙잡고 있을 시간도, 권한도 충분하지 않거든. 보존서고에는 작년에야 철 단위 목록이 작성된 종이 기록물이 여전히 쌓여 있고, 보유 기록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도 없어서 엑셀로 하고 있어. 전자결재시스템에는 일부 관여하지만 그 외 수십 개의 업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파악하기도 쉽지 않아(행정정보시스템으로 관리해야하지 않냐고? 그건 또다른 한 편 분량의 이야기). 그러다 보니 내가 이 곳에서 해야 하는 일은 공공기록물법에 따라 꼭 해야 하는 일들 중에서도 종이 기록물의 사후 관리에 집중돼. 기관마다 편차는 있지만 전직원이 수백 명 정도인 소규모 기관이 아니고서야 크게 다르긴 어려울거야.

그래서 수천 행, 수만 행의 엑셀을 마주할 때마다 내 첫 질문으로 돌아가게 되는거야. 여기에서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처음부터 불완전하게 작성된 정보 목록을 가지고,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기준을 바탕으로, 그 기준을 만들었던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들이 몇 번의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폐기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 그 안에서 오류를 찾아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이 현실적인 최선이라면, 그건 정말로 AI에게 맡기는게 맞지. 그렇다면 기록전문가가 평가 영역에서 아키비스트가 해야 할 일은 뭘까.

그럼 이것도 기록이에요?

라는 말에 대답할 기준을 만드는게 아닐까? 그게 있어야 AI에게 맡길 수도있고 말이야. 아키비스트는 다양한 상황에서 ‘이것도 기록이냐’는 질문을 들어. 그 맥락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지. 업무 과정에서 생산하거나 접수한 기록인 건 맞지만 ‘결재’ 문서가 아니니 자체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자체적 관리라는건 보통 폐기를 의미하고, 감사 등에 대비해서 최소한의 기록만 남기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뜻이지. 반대로 기관 차원에서까지 보존할 가치가 없는 것도 다 관리해주길 바라는 문의일 때도 있고.

이 질문을 받을 때 기관의 기록전문가는 법과 제도, 기록학적 지식, 그 기관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답을 해야 하지.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한 논의를 전사적으로, 중요한 업무로서 체계적으로 하기는 어렵다는거야. 기관 입장에서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개별적인 상황에서 비슷한 질문과 대답이 반복될 수는 있지만 그게 그 기관에서 기록의 정책적 정의를 만들어나가는 것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지.

사람들은 종종 인쇄기술시대의 법과 AI 시대라는 현실을 대비시키며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을 말해. 물론 맞아. 하지만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각 기관에서 공공기록물로서 관리할 기록의 범위와 종류를 아주 구체적으로 – 이것도 기록이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 정하지 않으면 크게 변할 건 없지 않을까 싶어. 어떻게 관리하든, 결국 관리 대상인 기록은 주로 결재가 완료된 문서들일테니까. 그럼 기록전문가는 왜 있는거지? 라는 물음만 커질지도. 기록에 대한 정책적 정의와 함께, AX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해결할 건 이것 아닐까.

사람에 기대지 않는,
정해진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

국가기록원은 이제 공공기록물법에 있는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 자료와 행정박물’이라는 문구 뒤에 서 있지 말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지 생각해야해. 이론적인 정의를 현실로 옮겨올 방법을 찾아야 해. 물론 각 기관의 기록전문가들은 그 곳에서의 최선의 실무를 찾아 나가겠지만 단 한 명의 개인이 고정된 상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어디까지나 지금 제도 안에서의 최선이고, 기관에서 만들고 남겨야 하는 기록이 존재하도록 하는 그런 평가가 되도록할 수는 없어.

그 구조를 국가기록원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만들려는건 – 기록관리평가 중 평가 관련 항목의 비중을 올린다든가 – 하는건 해답이 아니야. 업무 담당자들이 자신이 수행하는 업무의 한 부분으로 당연하게 기록관리를 해야만 하는 구조가 되어야지. 아주 구체적인 지침대로 일을 진행하지 않으면 그 부서와 기관이 확실한 불이익을 받는 체계가 있어야 해. 그래서 나는 공공기관의 기록관리는 결국 예산과 감사의 영역 안에 자리를 잡아야만 가능할거라고 생각해. 정말 시스템으로 풀어야 할 문제 – 기관에서 작업하는 모든 파일은 클라우드에 저장되도록 한다든가 – 또한 그 체계 위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봐.

사람에 의존하지 않는 구조. ‘이것도 기록이냐’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구체적인 정책이 있고, 업무 수행을 위해서라면 필수적으로 기록관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체계. 그게 없다면 아무리 ‘AI시대의 기록관리’에 대해 이야기해봐야 공공부문에서는 소용이 없을거야. 여전히 기록관리 대상은 결재문서로 국한될거고, 그나마 그렇게 존재하는 기록에 대한 평가도 100% 신뢰하기 어려운 절차 속에서 이루어지겠지.

기록학을 실용학문이라고 흔히 이야기해. 그런데 기록학계가, 국가기록원이, 기록전문가들이 그동안 공공기록물법이 제정된 그 때의 문제를 얼마나 해결해 왔는지는 잘 모르겠어. 지금처럼 기록 평가의 품질이 각 기관과 개인에게만 맡겨져 있고, 자의적인 선택이 작동될 여지가 곳곳에 존재하는 한, 공공기록물에 대한 기록 평가는 여전히 폐기 심의 업무를 넘어서기 어려울 거야. 우리가 배운 기록 평가의 정의와는 다르게 말이야.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일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감각. 하지만 그것을 내 의지만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무력함. 현재로서는 그게 내가 기록 ‘평가’ 업무를 할 때마다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이야. 이렇게는, 정말 그만 하고 싶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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