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성이라는 이름에게

아키비스트라운지 인사이트 아웃 #1 평가심의를 평가합니다 – 10


신애에게

먼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게요. 이 마지막 편지를 앞두고 한참을 머뭇거렸고, 나중에는 미뤄두었어요. 처음엔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앞섰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뭘까 하는 생각이 더 깊어지더라구요. 내가 평가에 대해 아는 게 대체 무엇인가 싶고요. 그렇게 글을 붙들고만 있었어요.

이 주제로 시리즈를 시작해 놓고, 마지막 편에 와서 평가가 뭔지 모르겠다니. 학술적인 정의와 이론은 알고 있지만 언제, 어느 시점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 일인가를 다시 들여다보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렸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마무리를 앞두고 나니 마음이 더 무거워진 것도 사실이에요. 처음엔 화두를 던지는 자리니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썼는데, 막상 닫으려는 때가 오니 뭔가 대안을 내야 할 것 같고, 답을 만들어야 할 것 같고 그랬어요. 뾰족한 대안도 없으면서 하소연만 늘어놓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런데 생각을 좀 바꿨어요. 새로운 방법론과 지향점은 연구의 결과로 내놓기로 하고, 언니와 주고받은 이 편지만큼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닫아보려고요. 우리가 이 시리즈를 시작한 건 정답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 카톡으로 나누던 그 날 것의 고민을 밖으로 꺼내보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한 가지가 보이더라고요. 어떤 기록을 생산할까, 이 기록이 누구에게 쓰일까, 얼마나 보존해야 할까 — 기록관리 전반에 평가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 서식을 이야기할 때도, 기록관리기준표를 이야기할 때도, 폐기금지를 이야기할 때도, 결국 우리가 매번 돌아온 자리는 ‘이 기록의 가치를 누가, 어떻게, 언제 판단하는가’였어요. 평가가 뭔지 모르겠다는 내 혼란은, 어쩌면 평가가 그만큼 도처에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평가를 더 다양한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단순히 보존기간을 매기고 폐기 여부를 결정하는 일에 국한되지 말고요. 전시·활용 가치, 2차적 활용 가능성, 외부 자원과의 협업, 타 기관으로의 처분까지 — 평가는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행위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평가’라는 말을 폐기 심의의 동의어처럼 좁게 써온 것이, 어쩌면 그 말을 민망하게 만든 첫 번째 이유였는지도요.

이제 기록관리계에 들어온 지 이제 16년 차예요. 이 기간 동안 전문요원 자격을 얻었고,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은 대부분 기관에서 기록연구사로 일하고 있어요. 이제는 10년 차를 넘긴 어엿한 시니어 연구사들이죠. 그런데 요즘 그 오래된 기록전문가들에게서 무력감이 느껴질 때가 참 많아요. 우리 앞에 얼마나 좋은 전망이 있을까 기대되지도 않고,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 대한 설렘보다 우려가 더 크고요. AI라는 변화도 우리에겐 행운이라기보다 입지가 좁아질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먼저 다가오는 게 솔직한 현실이에요. 언니가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는, 정말 그만 하고 싶어”라고 했던 그 마음을, 모두 매일 다른 얼굴로 마주하고 있어요.

그런 우리가 전문성을 어디에서 다시 찾고 길러야 할까 생각해보면, 평가이지 않을까요? 넓은 범위의 평가요.  기록을 둘러싼 전 과정에 걸쳐. 최근 재판에서 12.3 계엄 상황의 비화폰 서버 등이 대통령기록으로 인정됐잖아요. 유형에 기대지 않고, 내용과 업무 기능으로 ‘이것이 기록이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이런 것이 기록이어야 한다’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언니가 앞선 편지에서 처분동결을 이야기하며, 기록으로 획득되지 않았을 유형까지 동결 대상에 포함해야 의미가 있다고 했던 말들 처럼요.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판단의 힘이에요. 

기록관리가 팀이나 과 수준의 무게를 가지려면, 수동적인 포지션으로 어렵다는건 모두가 알고 있어요. 이미 생산된 기록을 관리하고 보존하고 서비스하는 일에 머물지 않고, 기록과 정보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로 나아가야 겠죠. 다만 한 가지는 미리 마음먹으려고 해요. 앞으로 평가에 대한 정책과 방법론을 만들어갈 때, 우리는 언제나 ‘현실성 있는 방안’을 요구하고 요구받게 될텐데요. 그 현실성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부터 다시 물어야 할 것 같아요. 예산이 없어서, 인력이 없어서, 시스템이 없어서, 기관이 따라오지 못해서 — 그러니 지금 수준에서 가능한 만큼만 시도하자는 것으로요. 그렇게 현실성이 현재의 제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과 같은 말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그토록 지적해온 문제들은 영원히 이상적인 이야기로만 남겠죠.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가 했던 고민을 두고 어떤 많은 실무자들이 쓴웃음을 지었던 것 처럼요.

저는 진짜 현실성은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해요. 트리거 기반 보존기간이 없어서, 폐기금지의 대상 기준이 모호해서, 사전평가가 제도로 자리 잡지 못해서 실제로 기록으로 획득되지 못하는 경우들. 이게 가장 시급한 현실적인 문제 아닌가요? 그러니 현실성을 따진다면, 그 일이 현 수준에서 가능한가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바꾸지 않으면 무엇을 잃어버리는가를 더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 편지를 어떻게 닫아야 할지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매일 카톡방에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이야기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 확실하게 느낀건, 10편의 글을 쓸 만큼 우리는 이 일에 애정이 있는건 분명한 것 같아요. 

답답하고 화가나면서도 잘 하고 싶은 이 일들을 언니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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